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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7 (화)

英 총리 관저의 진짜 ‘실세’는 ‘수석 쥐잡이’ 고양이 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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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저 상주(常駐) 고양이를 쓰다듬느냐는 종종 새 총리의 임무 수행 첫 테스트

최단명 총리 리즈 트러스는 끝내 못 만지고 퇴임

스타머 새 총리는 가족의 고양이들과 ‘평화’ 이루는 게 숙제

처칠 “무릎 위 고양이는 보온통 역할…전시 내각에 큰 도움”

지난 7월 총선에서 압승한 노동당의 영국 총리 키어 스타머(Starmer)는 런던 웨스트민스터구 다우닝 스트리트 10번지의 총리 관저로 입주한 이래 아직 한 가지 숙제를 풀지 못하고 있다. 이 관저의 터줏대감 격인 올해 열일곱 살 된 수컷 고양이 ‘래리(Larry)’와 어떻게 친해질 것이냐는 것이다.

고양이 래리는 영국 정부의 웹사이트에 ‘내각부 수석 쥐잡이(Chief Mouser to the Cabinet Office)’라는 공식 직함으로 소개된다. 래리의 공식 업무는 쥐 서식에 대한 해결을 모색하는 동시에, 관저의 보안 상태를 훑어보고, 고풍스러운 소파들이 낮잠 자기에 적당한지를 점검하는 것으로 돼 있다.

래리가 영국 총리 관저에 입주한 것은 지난 2011년 2월. 당시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 가족은 관저에 들끓는 쥐를 잡으려고 페트(pet) 입양기관을 통해 래리를 관저에 들였다. 래리는 오랜 길고양이 생활에서 터득한 약탈 습성으로 쥐를 잡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고 한다. 하지만 사람이 주는 사료에 익숙해지면서, 쥐 잡는 실적은 아직 “전술적 기획 단계” 수준이라고 정부 웹사이트는 밝혔다.

그런데 새 총리 스타머 가족에겐 원래 기르던 ‘조조(Jojo)’라는 이름의 활달한 수컷 고양이가 있다. 게다가 관저 입주를 앞두고 새끼 시베리안 고양이를 또 입양했다. 결국 영역 의식이 매우 강한 고양이들을 한 집안에서 어떻게 잘 키울 것이냐는 문제를 풀어야 한다. 잘못되면, 영국 일간지 데일리 메일의 표현처럼 ‘고양이 재앙(cat-astrophe)’이 될 수 있다.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 지어진 영국의 많은 관청에는 쥐가 많아 오래전부터 고양이를 키우기 시작했고, 1920년 영국 재무부는 이들 ‘공무원 고양이’를 위한 예산을 별도로 책정했다. 래리는 이런 관청 고양이 중에서도 ‘내각부 수석 쥐잡이’라는 공식 타이틀을 받은 첫 번째 고양이다.

래리는 별도의 소셜미디어 X 계좌도 운영해, 팔로워가 90만 명이 넘는다. 래리는 역대 영국 총리들이 다우닝스트리트 10번지의 검은 문 밖에 서서 발표를 할 때면, 그 옆에 앉아 있거나 주변을 어슬렁거린다.

반려동물 중에서도 특히 고양이를 제일 좋아하는 영국인들에게 래리는 종종 총리들보다도 호감도가 높다. 지난 7월 여론조사기관 입소스 조사에서 스타머 총리는 34%, 야당 보수당의 지도자가 된 전 총리 리시 수낙은 22%에 그친 반면에, 래리는 44%였다.

◇다우닝스트리트 10번지의 진짜 실세

영국 취재진은 래리의 높은 인기를 고려해, 총리의 관저 밖 사진에 래리도 함께 넣으려 한다. 그러다 보니, 영국 총리가 공개 장소에서 래리를 가볍게 쓰다듬을 수 있는지 여부는 종종 총리직 수행의 첫 테스트가 된다.

최단임 총리(2022년 8~10월)였던 리즈 트러스는 총리 관저 문 앞에 덴마크 총리와 함께 선 뒤 허리를 굽혀 옆에 앉은 래리를 만지려 했지만, 래리는 손길을 피하고 달아났다.

보수당의 마거릿 대처, 존 메이저 총리와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 총리로 이어지던 시절에도 총리 관저에 ‘험프리’라는 고양이가 있었다. 그러나 블레어 입주 후 6개월 만에 험프리는 가출해 길 고양이가 됐고, 블레어의 아내 체리는 한동안 험프리를 학대한 것 아니냐는 의혹에 시달렸다. 그래서 “다우닝 스트리트 10번지의 진정한 파워는 래리가 쥐고 있다”는 농담도 나돈다.

반려동물 고양이의 일반적인 수명은 15~20세. 총리실은 래리의 죽음을 발표할 계획까지 세웠다고 한다.

◇인근 장관 관저들의 고양이들도 래리에겐 꼼짝 못해

영역 의식이 특히 강한 래리는 역대 총리 가족이 데리고 오는 개ㆍ고양이들에게 결코 친절하지 않았다. 또 이웃집인 다우닝 스트리트 11번지 재무장관 관저의 ‘수석 쥐잡이’, 인근 외교부장관 관저의 ‘수석 쥐잡이’들과도 거리에서 종종 영역 다툼을 벌이고 쫓아내 영국 언론의 화제가 됐다.

래리는 길 건너 외교부장관 관저의 고양이 ‘파머스턴(Palmerston)’과도 종종 길거리 패권을 놓고 싸웠다. 결국 파머스턴은 귀에 상처를 입고 2020년에 낙향했다.

조선일보

다우닝 스트리트의 패권을 놓고 자주 다퉜던 총리 관저의 고양이 래리(왼쪽)와 외교부장관 관저의 고양이 파머스턴. 파머스턴은 2020년 '공식 직책'에서 물러나 시골의 한 가족에게 입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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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리는 스타머 직전의 보수당 총리였던 리시 수낙의 반려견 암컷 ‘노바’와도 수차례 싸움을 벌였다. 패자(敗者)는 폭스 레드 래브라도 리트리버 견종인 노바였다.

래리는 보리스 존슨 총리(2019년 7월~2022년 6월)의 잭 러셀 견종 ‘딜린’에게도 가혹했다. 존슨은 작년 말 일간지 인디펜던트 칼럼에서 래리를 “딜린을 두들겨 팬 깡패(thug)이자, 캣질라(catzilla)”라고 썼다. 2022년 12월에는 다우닝 스트리트에서 자기보다 덩치가 훨씬 큰 여우에게 수차례 덤벼들어 쫓아내는 모습이 목격됐다.

◇처칠 “고양이가 집사보다 전쟁 수행에 도움 커”

영국 총리들은 오래 전부터 관저에서 고양이를 키웠다. 1938년 팽창주의 정책을 펴고 있던 나치 독일의 히틀러와 유화적인 뮌헨 협정을 맺은 네빌 체임벌린도 고양이를 키웠고, 이후 총리 관저에 입주한 윈스턴 처칠도 유명한 호레이쇼 넬슨 제독의 이름을 딴 ‘넬슨’을 키웠다. 처칠은 체임벌린의 고양이를 경멸적으로 ‘뮌헨 쥐잡이(Munich Mouser)’라고 불렀다.

당시 체임벌린이 총리 관저에서 이사 나갈 때에 과연 ‘뮌헨 쥐잡이’가 처칠의 넬슨에게 관저를 내줄 것인가는 대서양 양안의 관심사 중 하나였다. 워싱턴 포스트는 1940년 6월 7일자에서 “다우닝 스트리트의 고양이들이 ‘고양이 의전’ 문제를 초래하고 있다”고 전했다.

결국 처칠의 넬슨이 승리했다. 처칠은 “고양이 넬슨은 전시 회의 때 내 무릎 위에서 보온통 역할을 해 연료 절약에도 도움이 된다. 집사(執事)보다 내각의 전쟁 수행에 더 많은 일을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스타머 새 총리 가족의 입주로 인해, ‘수석 쥐잡이’ 넬슨은 생애 여섯 번째 도전을 받게 됐다.

스타머 가족은 비극적인 고양이 싸움이 되지 않도록, 아직 가족의 두 고양이와 래리가 마주치지 않게 하고 있다. 스타머의 두 고양이는 관저의 거실을 벗어나지 않고, 래리는 관저의 안팎과 나머지 공간을 관할한다. 래리가 거리 ‘순찰’을 마치고 관저 현관 앞에 서면, 경찰이 밖에서 노크해서 문이 열리게 한다.

영국인들은 수많은 조언을 한다. ‘대면하기 전에, 담요 등으로 오랫동안 상대의 체취를 맡게 해 익숙하게 하라’ ‘한동안 벽을 설치해 물리적 접촉 없이 서로 존재를 알고 체취를 맡을 수 있게 하라’ 등등이다.

[이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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