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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5 (일)

“역적들이 명령을 위조했다”…고종, ‘개혁’을 도륙 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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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의 탈출로 1894년 7월 이후 1년 반 동안 갑오개혁을 추진해 온 “이 나라 1류의 인물들”은 하루아침에 ‘역적’이 되어 끔찍한 최후를 맞게 된다. 그 빈자리를 채우는 것은 고종에 대한 충성심만을 앞세우는 2·3류들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고종의 승리’가 반드시 ‘조선의 이익’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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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2월11일 새벽 이뤄진 아관파천은 갑오개혁에 대한 고종의 ‘역쿠데타’였다. 이후 일본의 힘을 빌려 개혁을 추진하던 세력이 완전히 제거되고 고종이 정국을 주도할 수 있게 된다. 사진은 러시아의 고려인 연구자 벨라 박이 1907년 7월11일치 러시아 신문 ‘노보예 브레먀’에서 찾아내 동북아역사재단에 제공한 것이다. 러시아 공사관 현관에 선 고종(제일 왼쪽), 순종(가운데), 베베르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동북아역사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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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년 9월 조선에 부임한 카를 베베르(1841~1910) 주조선 러시아 공사는 최선을 다해 조선과 고종을 도우려는 사람이었다. 고려인 러시아 학자 벨라 박의 저서 ‘러시아 외교관 베베르와 조선’을 보면, 그가 조선과 처음 만나게 된 계기는 1882년 7월 조‧러 국교수립의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에 파견됐을 때였다. 연해주를 둘러보면서 만난 조선인 이민들에 대해 “조선인들은 근면한 일꾼, 훌륭한 농부이며, 좋은 가정인”이라는 평가를 남겼다. 이후 줄곧 러시아가 적극적으로 일본의 한반도 침략을 막아야 한다는 지론을 굽히지 않았다.

을미사변이 발생했던 1895년 10월8일 새벽 베베르는 정동의 러시아 공사관에 있었다. 궁에서 막 탈출한 ‘친러파’ 이범진(1852~1911) 궁내부 협판이 심부름꾼 복장으로 뛰어와 “일본인들이 학살을 하고 있다. 아마 왕비를 죽일 모양인가 보다”라고 호소했다. 곧이어 참살 현장에 있었던 러시아 건축가 아파나시 세레딘-사바틴(1860~1920)도 달려와 자신이 두 눈으로 본 참상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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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이 1896년 2월11일부터 375일 동안 머물렀던 주조선 러시아공사관의 기공식 모습. 1890년에 찍은 것이다. 정동에서 지대가 높은 곳에 있어 서울 도심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당시 건물은 한국전쟁 때 대부분 부서졌다. 동북아역사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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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악한 베베르는 호레이스 앨런(1858~1932) 미국 공사관 일등서기관과 함께 경복궁으로 달려갔다. 나흘 뒤인 12일(제정러시아에서 사용하던 율리우스력으로는 9월30일) 알렉세이 로바노프-로스톱스키 외무대신에게 보낸 전문에서 “여러명의 유럽인들이 왕의 침소에 들어가자 숙연한 침묵의 광경이 펼쳐졌다. 국왕은 밤사이 발생한 사건에 깊은 충격을 받아 말할 기력도 없었으며 눈물을 참지 못하고 의례에 맞지 않게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다가가 손을 잡았다”고 적었다. 베베르는 이 순간 이 가련한 조선의 국왕을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겠다고 결심하게 됐는지 모른다.

당일 오후 3시 반 주한 일본공사관에서 조선 주재 외교사절단 모임이 열렸다. 베베르는 천인공노할 범죄의 ‘주범’인 미우라 고로 일본 공사에게 “궁전 내에서 소동을 일으키고 (왕비를) 살해한 일본인들의 성명을 밝히고, 궁전 내 사건과 대원군을 데려오는 일에 일본군이 가담한 것인지 분명히 밝히라”고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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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사변의 진상조사를 위해 1895년 10월 조선에 건너온 고무라 주타로(1855~1911) 정무국장은 그대로 주조선 일본공사로 눌러앉았다. 그는 아관파천이 발생할 것이란 낌새를 전혀 알아채지 못한 채 갑오개혁이 곧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고무라는 아관파천으로 개혁이 공중분해 되자 조선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접는다. 이후 일본의 외무대신으로 1905년 10월 을사조약, 1910년 8월 병합조약을 강제하는데 깊숙이 관여했다.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제공


궁지에 몰린 일본 정부는 대응에 나서야 했다. 11일 외무성의 ‘에이스’ 관료인 고무라 주타로(1855~1911) 정무국장을 책임자로 하는 사건조사단을 파견했다. 그는 17일 소환된 미우라의 후임으로 현지에 눌러앉게 된다. 동시에 도덕적 권위가 땅에 떨어진 일본의 조선 내 지위는 크게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사이온지 긴모치 일본 외무대신 임시대리는 25일 성명을 내어 “조선에서 군대를 소환”하고, 앞으로 조선에 대한 일본의 정략은 “무간섭 방침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사이온지가 성명을 낸 바로 그날 미국 공사관에선 이 사건의 사후 처리를 위한 외교사절단의 모임이 열렸다. 분노한 베베르가 요구한 것은 군권을 틀어쥔 채 고종을 위협하고 있는 조희연 군부대신의 해임과 을미사변에 가담한 훈련대의 해산이었다.

을미사변은 삼국간섭 이후 러시아에 기대려 했던 명성왕후를 제거하기 위해 일본이 ‘주범’이 되고, 갑오개혁 추진 세력인 김홍집(총리)‧김윤식(외부)‧어윤중(탁지)‧유길준(내부) 등이 ‘공범’으로 참여해 일으킨 참극이었다. 일본이 국제 사회의 지탄을 이기지 못해 ‘무간섭’ 방침으로 후퇴하자. 조선의 개혁세력이 베베르의 표적이 된 셈이다. 이는 역설적으로 이들이 처음으로 일본의 ‘노골적 간섭’에서 벗어나 정국을 주도할 기회를 얻었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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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베베르(1841~1910)와 그의 부인 제니가 조선에 부임하기 전인 1878년 찍은 사진. 베베르는 일본의 한반도 침략에 분개하며 러시아가 고종을 보호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고종의 이해와 조선의 이해가 늘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다.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는 그의 기념비적 저서 ‘러일전쟁-기원과 개전’에서 “그의 활동은 러시아의 국익을 수호하기보다 국왕 고종을 지탱하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라고 적었다. 베베르는 1897년 9월15일 조선을 떠났다. 동북아역사재단 제공


베베르의 요구를 들은 고무라는 조희연·권형진(경무사·현 경찰청장)과 만나 서구 열강의 분노를 전하며 사임을 요구했다. 그로 인해 10월30일 훈련대가 해체됐고, 11월26일엔 두 인물의 면직과 명성왕후의 복위 결정이 내려졌다.

조희연·권형진은 을미사변을 통해 다시 권력을 손에 쥔 김홍집 내각을 물리력으로 떠받치던 존재였다. 이들이 제거되자 바로 러시아와 미국 공사관에 머물며 호시탐탐 반전의 기회를 엿보던 이범진·이윤용·이완용 등 반대파들이 움직였다. 해임된 바로 다음날인 27일 밤 이범진 등은 경복궁 북서쪽 춘생문을 통해 침입해 고종을 구해내려던 이른바 ‘춘생문 사건’을 일으켰다. 이 정보를 오후 4시께 확보한 고무라가 김홍집 등을 찾아가 철저한 대비를 당부하며 춘생문 사건은 실패로 끝났다.

도전을 물리친 김홍집 내각은 개혁에 한층 더 속도를 낸다. 1895년 11월15일(음력, 양력으로는 12월30일) 내년(1896년)부터 양력과 ‘건양’(建陽)이라는 독자 연호를 쓰기로 결정했다. 동시에 ‘단발령’을 전격 시행했다. 당대인 황현의 ‘매천야록’을 보면, 고종이 탄식하며 정병하 농상공부대신에게 “네가 내 머리를 깎으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근대화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단발을 강요하는 것은 조선인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을미사변 때도 잠잠했던 유림은 “삭발을 하면 사람이 금수가 되고, 중화가 이적이 된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을미의병이 시작된 것이었다.

을미사변과 단발령 등 급진적 조처로 인해 고종과 민중의 분노는 위험수위에 다다르고 있었지만, 일본과 개혁세력은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긴 듯하다. 고무라는 1896년 1월21일 사이온지에게 보낸 전문에서 김홍집 등은 “현재 이 나라 제1류의 인물들”이라며 “실로 현 내각은 이 다난한 때를 맞이하여 서로 일치 협동해 난고를 함께한 무리들이 조직한 것으로 처음 조선에 내각제도가 도입된 이래 오늘날과 같이 그 단결의 공구함을 일찍이 보지 못했다”고 전했다. 나아가 고종은 “특별한 자기 소견을 갖고 있는 분이 아니므로 옆에서 지모를 일러주는 사람(명성왕후)이 없으니 내각 구성을 강압적으로 침범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면서, “개혁은 점차 잘 진척되리라 사료된다”고 예측했다. 하지만, 이는 조선의 실제 민심과는 한참 떨어진 ‘장밋빛 전망’에 불과했다. 특히 고종은 비참하게 살해된 아내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군주권을 제도화’하려는 신하들의 ‘꼭두각시’가 될 생각이 전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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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1835~1922)은 갑오개혁을 추진하던 김홍집 내각의 외부대신이었다. 일본 공사관과 짜고 을미사변의 진실을 왜곡하는 조회문을 만들어 조선에 머물던 외국 공사관에 돌렸다. 아관파천 이후엔 겨우 목숨을 건져 제주도에서 유배 생활을 했다. 1910년 8월22일 조선의 강제병합이 결정되는 마지막 회의에서 ‘불가’를 외친 것은 그가 유일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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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은 계속 속도를 냈다. 중요한 것은 재원 마련이었다. 김윤식 외부대신은 1월16일엔 고무라에게 1895년 3월 빌린 차관 300만엔의 상환 연기, 이틀 뒤인 18일엔 500만엔의 추가 제공을 요청하는 공문을 보냈다. 김윤식은 “우리나라 재정이 비록 극도로 궁색하여 위축되고 있으나 정리 방법을 바로 세우면 3년 뒤에는 반드시 여유가 조금씩 생겨나 자력으로 유지가 가능하다”고 적었다. 실제 그가 제출한 예산 계획서를 보면, 차관을 받은 3년차(1898년)의 세입은 787만5925원, 지출은 667만4157원으로 120만원 정도 재정 흑자를 기록하는 것으로 나와 있다.

이를 소개하는 22일치 고무라의 전문은 머잖아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는 갑오개혁이 내뿜은 ‘마지막 불꽃’이었다. 그는 이 안에 대해 “간곡히 탁지부 고문 등에게 주의를 주어 충실하고 정확히 세우도록 한 것”이라며 “조선의 전도가 아직 확고하지 않은 오늘날에 이 같은 거액을 대여하는 것은 약간 경솔하다는 비난이 있을지 모르고 이 나라가 능히 독립의 실을 거둘 수 있을지 의심스러운 바가 없지 않지만 (청일전쟁의) 선전조칙에서 밝힌 대로 혼자 힘으로 조선 독립의 기초를 공고히 하여야 할 의무를 짊어져야 할 것”이라고 적었다.

고무라가 이 전문을 보낸 지 불과 20일 뒤인 2월11일 고종의 ‘역쿠데타’인 아관파천이 일어났다. 베베르와 후임인 알렉세이 시페이예르 공사가 본국의 명확한 승인을 얻지 않은 채 독단으로 저지른 일이었다. 고종은 거처를 옮긴 직후 조령을 내려 “역적들이 명령을 잡아 쥐고 제멋대로 위조”했다며 “고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라고 피를 토했다.

고종의 탈출로 1894년 7월 이후 1년 반 동안 갑오개혁을 추진해 온 “이 나라 1류의 인물들”은 하루아침에 ‘역적’이 되어 끔찍한 최후를 맞게 된다. 그 빈자리를 채우는 것은 고종에 대한 충성심만을 앞세우는 2·3류들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고종의 승리’가 반드시 ‘조선의 이익’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김홍집 총리는 도망가자는 유길준 내부대신에게 “폐하를 알현해 마음을 돌리실 것을 촉구하고 성사되지 않으면 일사보국(一死報國)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후 벌어진 일을 담담히 전하는 고무라의 전문은 일본외교문서 제29권 683~687쪽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훗날 일본의 외무대신으로 을사조약(1905)과 강제합병(1910)을 주도하게 된다.

“경관들이 김(홍집) 총리를 차서 쓰러뜨리자마자 수명이 일제히 난도질하여 가슴과 등을 내리쳤습니다. 다리 부분을 거친 새끼줄로 결박해 이를 종로로 끌고 와서 주검을 벌려 놓고 ‘대역무도 김홍집’이라고 크게 쓴 종이를 붙였습니다. 길 위에 가득 찬 보부상들이 큰 돌을 던지기도 하고 발로 짓이겨 온전한 곳이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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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윤형 | 논설위원. 대학에서 정치외교를 공부했다. 도쿄 특파원, 통일외교팀장, 국제부장으로 일하며 일제 시대사, 한-일 과거사,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질서의 변화 등을 둘러싼 기사들을 썼다. 지은 책으로는 ‘나는 조선인 가미카제다’ ‘아베는 누구인가’ ‘26일 동안의 광복’ ‘신냉전 한일전’ 등이 있고, ‘공생을 향하여’ ‘북일교섭 30년’ 등을 번역했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힘은 스스로를 냉정히 돌아볼 줄 아는 ‘자기 객관화 능력’이라고 믿는다.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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