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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9 (목)

‘국회 무시’ 윤 대통령…박정희·전두환도 의식은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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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윤석열 대통령이 12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국가인권위원장 임명장 및 국민경제자문회의·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부의장, 규제개혁위원장 위촉장 수여식에 참석하고 있다. 대통령실통신사진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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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역대 대통령을 보면 정당과 의회를 거치지 않은 대통령이 세 사람이 있었다. 박정희, 그다음에 전두환, 이번 세번째 윤석열이다. 이분들은 의회의 본질적인 기능에 대한 개념이 없다.



박정희·전두환 대통령은 군의 힘을 가지고 그냥 압도해서 했기 때문에, 그리고 당시에는 여당이 주를 이루는 그런 의회를 가졌기 때문에 별로 문제가 없었다.



지금은 국회가 여소야대가 돼서 20대부터 21대, 22대까지 계속해서 세 번이나 야당이 국회를 좌지우지하는 그런 형편이 됐다. 그러면 그것이 뭐라고 하는 것에 대한 인식을 해야 한다. 그러니까 대통령이 민주주의 국가에서 의회의 기능이 뭐라는 걸 그래도 수용을 하고 거기에 맞춰야 한다.”



김종인 전 의원이 지난 6일 시비에스(CBS) 라디오 ‘박재홍의 한판승부’ 인터뷰에서 한 말입니다. 김종인 전 의원은 박정희·전두환 대통령 시절 정부와 국회에서 일한 경험이 있습니다. 지난 대선 때는 윤석열 대통령을 당선시키는 데 일조했습니다. 세 대통령을 직접 겪어본 정치 원로의 진단은 묵직할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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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당과 싸우며 국정은 ‘나 몰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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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열린 제22대 국회 개원식 겸 제418회 국회(정기회) 개회식에서 우원식 의장이 발언하고 있다. 22대 국회는 ‘87년 체제’ 이후 가장 늦게 개원식을 열었다. 또 대통령이 개원식에 불참한 것도 처음이다. 본회의 방청석에선 세월호 유가족들, 보라색 조끼를 입은 이태원 유가족, 사회 각계각층의 다양한 시민들이 우 의장의 초청을 받아 방청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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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국가에서 의회의 기능이 뭘까요? 국회의원은 국민의 대표입니다. 우리나라는 1948년 5월10일 총선으로 국회의원 198명을 선출했습니다. 의원들은 5월31일 본회의를 열어 국회를 구성했습니다.



국회는 7월17일 헌법을 제정 공포했고, 그 헌법에 따라 7월20일 초대 이승만 대통령을 선출했습니다.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했습니다. 국회-헌법-대통령-정부 순으로 탄생한 것입니다. 국회가 ‘넘버 원’, 대통령이 ‘넘버 스리’입니다.



대통령은 국가의 원수이고 외국에 대하여 국가를 대표합니다. 하지만 국민의 대표들이 모인 국회 위에 군림할 수는 없습니다. 역대 대통령들이 4년마다 소집되는 국회 개원식에 꼬박꼬박 참석한 이유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2일 22대 국회 개원식에 참석하지 않은 것은 상당히 중대한 정치적 사건이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거의 모든 신문이 사설로 대통령의 국회 개원식 불참을 비판했습니다.



조선일보는 1면에 ‘1987년 직선제 후 국회 개원식서 연설한 대통령들…올해는 한덕수 총리가 참석만’이라는 제목으로 전직 대통령들이 국회 개원식에서 연설하는 사진을 모아 실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 사진이 들어가야 할 자리에는 한덕수 국무총리 사진을 실었습니다. 대통령의 국회 개원식 불참이 비정상이라는 의미가 돋보이는 편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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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3일치 조선일보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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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 여론에 윤석열 대통령이 좀 당황했을까요? 9월4일 정진석 비서실장은 대통령실 전 직원 조회에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국회가 이성을 되찾고 정상화하기 전에는 대통령께 국회에 가시라고 할 수 없다. 대통령을 향한 조롱과 야유, 언어폭력이 난무하는 국회에 가서 대통령이 곤욕을 치르고 오시라고 어떻게 말씀드릴 수 있느냐. 국회 의장단이나 야당 지도부가 이런 상황을 뻔히 방치하면서 아무런 사전 조치도 취하지 않고 대통령이 국회에 와서 망신당하라고 한다.”



대통령실 관계자가 전한 내용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국회에 가도록 설득하지 못했다는 것인지, 정진석 실장 자신이 적극적으로 가지 말라고 만류했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정진석 실장은 정치 경험이 풍부한 사람입니다. 저는 정진석 실장이 윤석열 대통령에게 어느 정도 ‘직언’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착각이었습니다. 지금까지 5개월 동안 정진석 실장의 점수는 낙제 수준이라는 게 국민의힘 사람들의 평가입니다. 단 한마디도 쓴소리를 하지 못하고 대통령의 비위를 맞추는 데만 열심이라고 합니다. 이번 전 직원 조회 발언도 그런 맥락에서 나온 아부에 불과했던 것 같습니다. 실망입니다.



대통령과 비서실장이 국회를 함부로 대하니 국무총리와 장관들도 국회를 함부로 대하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9일부터 나흘 동안 진행된 국회 대정부질문은 과거 대정부질문과 분위기가 많이 달랐습니다. 특히 한덕수 국무총리가 그랬습니다. 본래 조용한 성품인 한덕수 총리는 연일 야당 의원들과 맞고함을 치며 싸우는 놀라운 장면을 연출했습니다.



한덕수 총리의 이런 변화를 조선일보는 11일치 6면에 “정치권 ‘한덕수의 재발견’…때린 야가 울고 간 ‘철벽 총리’”라는 제목을 달아 긍정적으로 보도했습니다. 이 기사 때문이었을까요? 한덕수 총리의 답변 태도는 점점 더 거칠어졌습니다. 박성재 법무부 장관은 답변을 마치고 자리로 돌아가며 야당 의원들을 노려보기도 했습니다.



국무총리와 장관들의 태도가 달라진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국민의힘 관계자는 아주 쉽게 설명했습니다.



“야당이 주도하는 국회와 타협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윤석열 대통령의 뜻이 확인된 이상, 국회에서 야당과 격렬하게 싸워야 대통령의 신임을 얻고 자리를 오래 지킬 수 있다.”



그런가요? 윤석열 대통령은 국회와 맞서 싸우면서 국정을 도대체 어떻게 이끌어가려는 것일까요? 처음에 소개해드린 김종인 전 의원의 발언은 바로 그 지점에 대한 걱정입니다.



과거 박정희·전두환 시대에 대통령과 국회의 관계는 어땠을까요? 김종인 전 의원 말대로 ‘압도적인’ 관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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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5·16 군사반란 직후 박정희 소장(왼쪽부터), 박종규 소령, 이낙선 소령, 차지철 대위. 한겨레 자료사진




박정희·전두환도 국회 의식했는데





박정희 군부의 국가재건최고회의는 1963년 이전 국회의원선거법을 폐지하고 새로운 국회의원선거법을 제정했습니다. 지역구 정수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전국구 의원 제도를 새로 만들었습니다. 명분은 ‘지연, 혈연의 폐단을 방지하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사실은 여당이 국회 안정 의석을 확보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지역구 선거에서 1당의 득표 비율이 50% 이상일 때는 각 정당의 득표 비율에 따라 전국구 의석을 배분하고, 50% 미만일 때는 1당에 전국구 의석 절반을 배분하도록 했습니다. 1당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방식이었습니다.



이마저도 불안했던지 박정희 대통령은 1972년 유신헌법에서 전국구를 없애고 의원 정수의 3분의 1을 통일주체국민회의가 뽑도록 했습니다. 이들은 유신정우회(유정회)라는 교섭단체로 활동했습니다. 통일주체국민회의 의장인 대통령이 유정회 의원들을 임명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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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2·12 군사반란 직후 사실상 권력의 최고 실세로 떠오른 전두환 소장.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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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981년 국가보위입법회의가 기존 국회의원선거법을 폐지하고 새로운 국회의원선거법을 제정했습니다.



지역구는 2인씩 뽑는 중선거구제를 도입하고, 지역구 의석의 50%를 뽑는 전국구는 지역구 1위 정당에 3분의 2를 몰아주도록 했습니다. 중선거구제 도입, 전국구 배분 방식 모두 집권 여당인 민정당의 안정 의석 확보를 위한 꼼수였습니다.



박정희나 전두환이나 쿠데타로 집권한 독재자였고 국회를 통치의 도구로 활용했지만, 어쨌든 입법권을 가진 국회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인 1971년 10월 야당이 제출한 오치성 내무부 장관 해임건의안에 공화당 의원 일부가 찬성표를 던져 가결됐습니다. 이른바 ‘10·2 항명 파동’이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중앙정보부를 시켜 공화당 의원들을 잡아다 고문하고 정계에서 쫓아냈습니다. 하지만 국회의 해임건의를 받아들여 오치성 장관을 해임했습니다. 헌법에 ‘대통령은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국회의 해임건의에 응하여야 한다’는 조항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박정희·전두환 대통령처럼 독재자가 아닙니다. 국회의원들을 불법적으로 잡아 가두거나 쫓아낼 권한을 갖고 있지도 않습니다. 그런데도 무슨 배짱으로 박정희·전두환 대통령보다 더 국회를 무시하고 깔보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도대체 왜 그럴까요?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6일 뒤인 2022년 5월16일 국회에서 추가경정예산안 시정연설을 했습니다. ‘의회주의’라는 단어를 무려 네 차례나 사용했습니다.



“진정한 자유민주주의는 바로 의회주의라는 신념을 저는 가지고 있습니다. 의회주의는 국정 운영의 중심이 의회라는 것입니다. 저는 법률안, 예산안뿐 아니라 국정의 주요 사안에 관해 의회 지도자와 의원 여러분과 긴밀하게 논의하겠습니다.”



“오늘 제가 제안 설명을 드릴 추경안은 우리 앞에 놓인 도전을 의회주의 원리에 따라 풀어가는 첫걸음으로서 의미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이 자리가 우리의 빛나는 의회주의 역사에 자랑스러운 한 페이지로 기록되기를 저는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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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2022년 5월16일 오전 국회 본회의장에서 취임 후 첫 시정연설을 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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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회주의, 윤이 입에 담을 말 아냐





그때는 잘 몰랐습니다. 당시 윤석열 대통령의 의회주의 발언은 ‘영혼 없는 립서비스’였습니다.



의회주의가 뭘까요? 윤석열 대통령은 “국정 운영의 중심이 의회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주요 국가 정책을 국회에서 결정하는 것이 의회주의입니다. 절대적인 여소야대 국회인 지금은 주요 국가 정책의 주도권을 야당이 행사하는 것이 바로 의회주의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동의할 수 있을까요?



마무리하겠습니다. 우리나라 역대 정치인 중에 의회주의자로 불린 몇 사람이 있었습니다. 독재에 맞서 국회에서 빛나는 의정 활동을 펼쳤던 김영삼·김대중 대통령이 있었습니다. 이만섭·정의화 국회의장도 있었습니다. 이만섭·정의화 국회의장은 삼권분립 헌법정신을 지키기 위해 대통령과 갈등과 대립을 불사한 용감한 정치인들이었습니다.



의회주의는 윤석열 대통령이 함부로 입에 담을 수 있는 단어가 아닙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의회주의자가 되는 것은 어차피 불가능합니다. 기대할 수 없습니다. 다만 현실을 인정하는 현실주의자가 되어 달라고 간절히 당부하고 싶습니다. 그래야 이 암담한 무한대치 정국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비로소 열리기 시작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치부 선임기자 shy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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