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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5 (일)

연극 ‘보도지침’ 실제 주인공 김주언 기자 “지금은 언론 간접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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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보도지침’의 실제 주인공 김주언(왼쪽) 전 뉴스통신진흥회 이사장과 희곡을 쓴 오세혁 극작가가 지난달 31일 서울 마포아트센터에서 만났다. 마포문화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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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대생이 성희롱당한 정도의 사건을 1면에 실을 만큼 세상에 뉴스가 없어?”(편집국장) “학생운동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형사가 성고문을 했다고요. 공권력이 성폭력을 저질렀단 말입니다.”(기자)



연극 ‘보도지침’에서 기자 김주혁의 기사를 막으려던 편집국장은 결국 이런 조건을 내건다. “검찰 발표 위주로만 쓸 것, 1면 말고 사회면에 실을 것, 성 모욕 사건이라고 완화된 표현을 쓸 것, 검찰 발표 외에 독자적인 취재를 하지 말고 다른 단체의 성명서도 싣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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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초연 이후 다섯 번째 시즌을 맞은 연극 ‘보도지침’ 공연 장면. 마포문화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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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정권 시절 ‘보도지침 폭로 사건’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이 연극이 2016년 초연 이후 다섯 번째 시즌을 맞았다. 오는 8일까지 서울 마포아트센터 플레이맥 소극장 무대에 오른다.



보도지침을 폭로한 실제 주인공 김주언(70) 전 한국일보 기자가 지난달 31일 연극을 관람하고 작품을 쓴 오세혁(43) 작가와 만났다. 초연 때부터 인연을 맺은 두 사람은 젊은 관객이 많다는 점에 놀라움을 표시하며 반갑게 인사했다.



“과거 언론 통제에 대한 고발이나 언론자유를 위한 노력을 훼손하지 않는다면 나머지는 예술가들이 얼마든지 각색할 수 있다고 봐요.” 최근 뉴스통신진흥회 이사장직에서 퇴임한 김주언씨는 “작가의 상상력이 더해져 관객이 더 재미있고 실감 나게 보는 것 같다”고 했다.



심각한 내용이지만 연극 곳곳에 유머코드를 장착해 객석에선 수시로 웃음이 터진다. 기자와 검사, 변호사가 같은 대학 연극반 출신이란 설정은 허구인데, 징에 술을 부어 마시는 장면은 작가가 대학 연극반에서 실제 경험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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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9월 ‘말’ 특집호에서 공개한 ‘부천서 성고문 사건’ 보도지침 원본(86년 7월17일치).


연극에서 김주언 기자는 김주혁으로, 월간 ‘말’은 월간 ‘독백’으로 살짝 이름을 바꾼다. 연극에 나오는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보도지침은 실제 그대로다.



보도지침이 편집국장실 팩스로 전달되는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는 청와대 정무수석실이 작성해 문화공보부 홍보조정실을 통해 전화로 전달했다. 물증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였다.



“부국장이 날마다 전화로 내려오는 지시를 받아쓰고, 그 내용을 복사해 주요 부서 부장에게 전달했어요.” 당시 한국일보 편집부에서 내근하던 7년 차 기자 김주언은 월별로 한부씩 모아놓은 이 문서철을 복사해 빼낸다.



1985년 10월부터 이듬해 8월까지 언론사에 내려간 지침 584건은 놀랍도록 세밀하고 구체적이다. 보도지침의 존재는 김 기자가 전달한 문건을 해직언론인들이 만든 민주언론운동협의회(민언협)가 월간 ‘말’을 통해 폭로하면서 만천하에 드러난다.



당시 민언협 의장이던 송건호 전 한겨레신문 대표와 김태홍 사무국장, 성유보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사무처장, 박우정 ‘말’ 편집장 등이 일련의 작업을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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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보도지침’의 실제 주인공 김주언씨(아랫줄 가운데)가 오세혁 작가(아랫줄 오른쪽), 정철 연출가(아랫줄 왼쪽) 등 제작 ·출연진과 함께했다. 마포문화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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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함께 1987년 6월항쟁의 도화선이 됐던 보도지침 사건은 시간이 흐르면서 1980년대생 이후는 잘 모르는 사건이 됐다. 1981년생인 오 작가도 작품을 의뢰받기 전에는 보도지침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그는 “보도지침 네 글자를 검색해보고 두려운 마음도 들었지만 사건을 폭로할 당시 김주언 선생님과 비슷한 나이에 이 사건을 연극으로도 만들지도 못한다면 연극을 할 이유가 있겠냐 싶어서 용기를 내게 됐다”고 집필 당시를 떠올렸다.



연극반 설정에 대해선 “말의 힘, 뱉은 말을 책임진다는 점에서 언론의 기사와 배우의 독백이 다르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고 설명했다. 극 중엔 ‘연극은 시대의 정신적 희망’이란 대사가 나오는데, 실제 서울연극협회 슬로건이다.



다섯 시즌을 이어오는 동안 매번 연출과 배우들이 바뀌었다. “나 자신을 바꾸고 뭔가 새로운 길을 가고 싶다며 연극에 참여한 배우들이 많았어요.”



오 작가는 “청소년 관객이 늘고, 대학과 고교는 물론, 여중학교에서도 학교 공연을 허락해달라는 요청이 많아 보람이 있다”며 웃었다. 그는 박정희 정권 시절 강제 해직당한 언론인 모임인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를 다룬 작품도 구상 중이다.



보도지침 폭로 이후 김 기자는 악명 높은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간다. 국가보안법 위반, 외교상 기밀누설죄,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국가 모독죄란 죄목으로 실형을 선고받고, 1995년에야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는다.



“반국가 세력이 암약하고 있다는 윤석열 대통령의 얘기를 듣는 순간, 유신 시절로 다시 돌아간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어느덧 38년이 흘러 칠순에 접어든 김주언씨는 요즘 언론 현실에 대한 착잡한 심경을 드러냈다.



“과거엔 정부가 직접 지침을 내려 보도를 통제했다면 지금은 공영방송 사장을 바꾸는 등 간접적인 통제로 바뀌었죠. 일선 기자, 언론인들이 중심에 서지 않으면 언론개혁은 이뤄지기 어려워요.”



그는 “기자들을 권력의 애완견 같은 랩도그(Lapdog)나 공격견에 비유하기도 하는데, 사회와 권력에 비판적인 감시견(Watchdog)으로서의 덕목이 중요한 시기인 것 같다”고 말했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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