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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5 (일)

폭염 속 64kg 리어카 끄는 노인들 “오늘 5000원 벌어, 자식들 올 때면 숨겨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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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g당 약 80~100원 선...하루종일 64kg 폐지 수거해 5120원 벌어

극심한 폭염 탓에 폐지 가격 올라도 폐지 줍는 노인들은 줄어

전문가들 “거리 노동자들이 더위 피할 공간 마련해야”

조선일보

지난 19일 서울 강북구에서 이모(77)씨가 폐지를 담은 리어카를 힘겹게 끌고 이동하고 있다. /정창경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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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일 오후 4시쯤 서울 강북구 삼양사거리역 앞에서 만난 이모(77)씨는 허리를 숙여 폐지를 실었다. 이날 서울 낮 최고기온은 섭씨 35도. 몸무게가 40kg도 채 되지 않는 이씨는 4년 전 폐지 리어카를 끌다 교통사고로 허리, 다리를 다쳤다고 한다.

아픈 허리를 부여잡고 이씨는 올 여름도 일주일에 나흘씩 폐지, 폐품을 수거하러 다닌다. 이씨는 “자식들에게 폐지 줍는 것을 알리기 싫어 자식들이 집에 올 때면 리어카를 숨겨놓는다”며 “하루 평균 2000원 남짓 벌지만 그래도 오늘은 선풍기 하나를 주웠다. 운이 좋았다”고 했다.

같은 시각 서울시 강북구의 한 고물상에서 만난 박동화(83)씨는 폐지 약 64kg을 손수레에 실어 끌고 왔다. 성인 남자 몸무게에 버금가는 무게였지만 고물상과의 실랑이 끝에 kg당 약 80원 선에서 가격이 결정됐다. 박씨가 손에 쥔 금액은 5120원. 박씨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아도 땀이 쏟아지지만, 80원이라도 벌려면 나와야 한다”고 했다.

이날 고물상에 방문한 폐지 수집가 10명 가량은 모두 노인이었다. 모두 햇볕을 막기 위한 팔 토시나 긴팔 옷, 밀짚모자, 마스크 등으로 전신을 감쌌다. 손수레나 리어카에 양산을 매달은 노인도 있었다.

자원순환마루(자원순환정보시스템) 재활용가능자원 가격조사에 따르면 폐지(골판지) 가격은 1kg 당 작년 평균 76.3원에서 올해 6월까지 85원을 기록, 7월엔 100.5원까지 급증했다. 폐지 가격은 일부 오르고 있지만 극심한 폭염 탓에 폐지를 줍는 노인들은 점점 줄고 있다고 한다. 한 고물상 직원은 “최근엔 날이 더워서 폐지를 주우시는 어르신들이 많이 줄었다. 오시는 경우에도 해가 진 저녁 시간대에 오시는 분들이 더 많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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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일 오후 찾은 서울 종로구 안국역 앞. 포차 8곳 가량이 줄지어 있었지만 영업하는 곳은 한 곳도 없었다. /강우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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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오후 4시쯤 찾은 100여개의 노점이 즐비해 있는 명동 길거리음식거리에도 영업을 하는 곳을 찾아보기는 힘들었다. 다만 해가 조금씩 지는 오후 4시 30분쯤부터 상인들은 바퀴가 달린 노점을 직접 영업하는 곳까지 끌고와 가스를 연결하는 등 영업 준비를 시작했다. 이곳 노점상들은 관할인 중구청과 협의해 영업 시작 시간을 오후 5시쯤으로 정해놓고 영업하고 있다고 한다.

명동에서 십원빵 등을 판매하는 노점을 운영 중인 김모(23)씨는 “코로나 거리두기 해제 이후 최근 매출이 회복세인건 맞지만 확실히 여름이 가장 장사가 안된다”며 “한낮에는 사람이 많아도 요즘 같은 폭염에는 도저히 장사를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서울 서초구에서 담배, 오징어, 음료 등을 판매하는 잡화노점을 운영하는 김모(70)씨는 “노점상들이 가장 고역을 겪는 계절이 바로 여름과 겨울이다. 그런데 가면 갈수록 여름과 겨울, 특히 여름이 길어지고 있어 걱정”이라고 했다. 실제 폭염이 매년 심해지면서 날씨 영향을 많이 받을 수 밖에 없는 노점상 숫자는 점점 줄고 있다. 본지가 서울시로부터 확보한 자료에 따르면 서울시 내 노점상 개수는 지난 2020년 6079개에서 지난해 5050개로 1000개 넘게 감소했다.

행정안전부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에 따르면 올해 폭염 온열질환자는 3250명 발생해 작년 같은 기간(2672명)보다 578명 늘었다. 폭염일수 역시 전년(14.1일) 대비 8.2일 늘어난 22.3일을 기록했다. 지난 7월 31일에 발령됐던 폭염 중대본 비상 1단계는 29일만인 지난달 28일에 해제돼 역대 최장기간 운영을 기록했다. 여태껏 폭염 중대본이 가장 길게 운영됐던 해는 ‘기록적 폭염’이 닥쳤다고 평가받는 2018년(6일)이었다. 최근 정부는 역대급 폭염으로 외부 활동을 자제하라는 긴급 문자를 발송하고 있다. 하지만 폐지 수집·노점상 등 야외에서 생업을 이어가는 이들은 “그럼 뭐해먹고 사냐”고 말한다.

전문가들은 공공 차원에서 거리 노동자들이 더위를 피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대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최근 늘어난 스마트 정류장 같이 지자체가 길거리 노동자들이 더위를 피할 수 있는 거점 공간 마련 등 적극적으로 대책을 모색해야 한다”며 “취약계층만 이용할 수 있는 무더위 쉼터는 일반 시민의 저항감을 살 수 있기 때문에 시민 휴게소 등으로 명명해 누구나 쉽게 접근하고 이용할 수 있는 공간으로 조성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임걸 송원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주요 길목 및 거주지에 밀집한 편의점과 계약을 맺고 취약계층 노동자들이 음료 등을 섭취할 수 있도록 ‘푸드 바우처’ 등을 제공하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강우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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