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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4 (토)

“송혜희 좀 찾아주세요”… 현수막 260개 남기고 떠난 父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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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찾아 희망 찾아 뛰다가… 안타까운 교통사고 두 죽음

25년간 딸 찾던 송길용씨, 현수막 달러 가다 트럭 충돌해 숨져

조선일보

1999년 실종된 딸을 찾아 전국을 누볐던 송길용씨가 2015년 5월 5일 본지와 인터뷰하는 모습. 경기 평택 그의 단칸방에는 딸 송혜희양의 사진과 전단이 빼곡하게 붙어 있었다. 송씨는 지난 26일 딸을 찾지 못한 채 교통사고로 숨졌다. /이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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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된 송혜희를 찾아주세요’라는 현수막을 전국 방방곡곡에 붙이며 25년간 딸(1981년생)을 찾았던 송길용(71)씨가 딸을 만나지 못하고 지난 26일 경기 평택의 한 도로에서 교통사고로 숨졌다. 나주봉 전국미아실종가족찾기 시민의모임 회장은 “송씨가 트럭을 끌고 나가다가 덤프트럭과 충돌했다”며 “이날도 딸을 찾는 현수막을 달러 가는 길이었던 것 같다”고 했다.

송씨의 빈소는 평택의 한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영정 속 고인의 눈빛은 고요했고 입가엔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한 조문객은 “송씨의 지난 25년은 딸이 실종된 1999년 2월 13일에 멈춰 있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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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혜희 아버지 故 송길용씨 분향소. /구아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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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탄여고 2학년 재학 중이던 둘째 딸 혜희는 이날 학교에 공부한다며 나간 뒤 돌아오지 않았다. “교사가 돼 부모님 고생을 덜어드리겠다”던 딸이었다. 딸이 용돈을 모아 개통해준 016 휴대전화 번호를 송씨는 20년 가까이 유지했다. ‘혜희가 전화를 건다면 이 번호로 걸 테니 바꿀 수가 없다’고 했었다.

딸 송혜희를 찾아달라는 현수막은 서울·천안·부산·해남·강릉 등 전국에 붙지 않은 곳이 없다. 아버지가 25년간 뿌린 전단은 1000만장가량, 현수막도 1만장에 육박할 것으로 추산된다. 송씨는 1t 트럭에 현수막과 전단을 싣고 100만㎞가량을 주행했다. 서울 한남대교 북단부터 양재나들목까지, 광화문·을지로·종로·명동 등에 걸린 현수막엔 딸의 실종 당시 모습과 인상착의 등이 ‘가족이 애타게 찾고 있다’ 문구와 함께 빼곡히 인쇄돼 있었다.

실종 당시 초동수사에서 딸이 버스에서 내릴 때 낯선 30대 남자가 뒤따랐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하지만 해당 정류장은 논밭과 야산뿐인 지역이었고 인근에 감시 카메라도 없었다. 용의자 추적에 진척이 없자 송씨 부부는 직접 전단을 들고 딸을 찾아 나섰다. 경찰 수사는 2004년 종결됐다. 우울증을 앓던 송씨 아내는 2006년 딸의 전단을 가슴에 품고 자살했다. 납치 혹은 인신매매 공소시효는 2014년 2월 끝났다.

송씨가 살던 평택의 33㎡(10평) 단칸방에 ‘나의 딸 송혜희는 꼭 찾는다’라는 가훈(家訓)과 딸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트럭에서 라면 끓여 먹으며 딸을 찾아 헤매느라 전 재산을 쓴 송씨는 기초 수급자가 돼서도 정부 지원금 60만원 중 40만원을 현수막·전단 제작에 썼다. 아버지는 전국을 돌며 비바람에 해지고 햇볕에 바랜 현수막을 새것으로 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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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길용씨가 실종된 딸을 찾기 위해 서울 세종대로 사거리에 내건 현수막. /박돈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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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수막을 걸다가 사다리에서 떨어져 허리를 다쳐 두 차례 수술을 받았다. 10여 년 전엔 뇌경색 진단을 받았고 후유증으로 왼쪽 다리를 절게 됐다. 40대 중년이 70대 병든 노인이 됐지만 아버지는 “귀신이 돼서도 반드시 딸을 찾고야 말겠다”(2020년 본지 인터뷰)고 했다. 전단 한 장이라도 더 찍으려 거리 골목에서 폐지를 줍는 ‘혜희 아빠’의 모습은 평택 시민들에겐 일상적이었다고 한다.

사망 한 달 전부터 송씨의 건강은 급격히 악화됐다. 코로나 감염으로 병원에 자주 오갔고, 이전엔 심장 수술도 받았다. 하지만 저녁 식사를 하고 오후 8시 30분 평택 자택을 나와 경부고속도로 상행선을 타고 서울로 온 뒤 수도권 일대를 돌며 현수막을 점검하는 하루 일과는 계속 소화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주변에선 혜희가 이미 세상에 없을 것이라며 “집착을 그만 버리라”고 하는 사람도 적잖았다. 하지만 고인은 거리의 30~40대 여성을 볼 때마다 “내 딸이 반드시 저렇게 살아 있을 것”이라며 “딸을 찾으려 전단을 돌리고 현수막을 거는 일이 가장 행복하다”고 했다. 딸을 잃은 아버지가 살아갈 힘을 얻는 의지처는 딸을 찾는 행위 그 자체였다.

송씨의 사망 소식은 갑작스러운 연락 두절을 이상하게 여긴 현수막 업체가 실종자 가족 단체에 연락하면서 알려졌다. 아버지가 걸어둔 현수막이 세상에 260개쯤 남아 있다.

[평택=구아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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