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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3 (금)

[이지현의 미술래잡기] 여름밤의 애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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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윈즐로 호머 '여름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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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한 달 정도는 계속 더울 것 같지만 그래도 살짝 여름이 지나가는 듯하고, 언젠가는 입에서 '덥다 덥다' 소리가 안 나오는 날이 오긴 온다. 기록적인 폭염에 사상 최장의 열대야가 지속되어 분명 힘들고 지치는 나날이었지만, 수박, 팥빙수, 옥수수에 방학과 휴가가 있는, 쪼가리만 걸치고 돌아다녀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 여름은 특유의 자유로운 낭만으로 우리를 들뜨고 설레게 한다. 모든 계절이 저마다의 매력이 있지만, 녹음(綠陰)이 우거진 여름이야말로 우리가 자연과 공존하고 있음을 더 깨닫는 때가 아닐까 싶다.

개인적으로 이번 여름에는 사랑하는 친척과 친지를 잃어서 장례식장을 찾아 가슴 아파하는 일이 유난히 잦았다. 눈물을 훌쩍이다 밖으로 나오면 해가 쨍쨍하고, 나무와 풀이 우거져 있고, 가벼운 옷차림에 음료수를 들고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생과 사의 대비가 더 크게 다가오곤 했다. "햇빛 눈이 부신 날에 이별해봤니/ 비 오는 날보다 더 심해/ 작은 표정까지 숨길 수가 없잖아." 1990년대 인기가 많았던 R.ef의 노래 '이별공식'의 가사다. 헤어지는 연인에 관한 노래였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어떤 종류의 이별에도 딱 들어맞는 문장이다. 햇빛이 찬란할수록, 내 가슴은 이리 아픈데 주위 상황이 너무 밝아서 슬픔이 배가될 수 있다. 자연이 열정적으로 타오르는 시기에 뭔가가 혹은 누군가가 사그라진다는 사실이 여름에 일어난, 그리고 또한 여름을 보내는 애석함을 더 깊게 만든다.

1890년에 미국의 화가 윈즐로 호머가 그린 '여름밤'이라는 작품은 여름에만 느낄 수 있는 이런 미묘한 느낌이 잘 드러난다. 파도가 일렁이고 달빛이 환한 바닷가에 사람들이 모여 있다.

젊은 여성 둘이 춤추는데, 옆에 있는 사람들이 노래를 불러줬거나, 그도 아니면 일정한 박자로 치는 파도 소리를 음악 삼아 달빛에 취해 춤을 추게 된 것이 틀림없다. 하늘하늘 얇은 드레스를 입은 여인들은 저녁 바람에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부유하듯 움직이고 있다.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하다 전업화가가 된 호머는 1860년대 프랑스를 방문해 당시 유행하던 인상주의 미술을 접했지만, 아직 미국에서 주류를 이루던 사실주의 화풍을 버리지 않는 대신 인상주의가 주목한 빛, 편편하고 단순화된 화면, 그리고 자유분방한 붓질을 자기 스타일로 흡수했다. '여름밤'은 달빛을 반사하는 바다와 하얀 드레스, 그리고 그림자 진 곳에 위치한 사람들 사이에서 도드라지는 대비가 명암 표현에 능숙했던 호머의 실력을 드러내는 수작이다. 힘찬 파도와 지금이라도 빙글빙글 돌 것 같은 여인들의 움직임에서 평범한 바닷가 풍경 안에 격렬하면서도 잔잔한 리듬도 만들어졌다.

이런 기술적인 면만큼, 호머의 '여름밤'은 화가가 관찰한 순간이 신비롭게 승화하면서 보는 사람의 마음속에 공명하게 만드는 회화의 마법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달빛 아래 사람들이 모여 왜 춤을 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들이 여름밤을 자기만의 기분과 방식으로 보내고 있는 것만은 알 수 있다. 뭔가 감정이 고양되어 춤추는 사람도 있지만, 바닷가에 자리한 사람들이 여름밤에 느끼는 정취가 그저 신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나름의 한가로운 여유가 있고 뭔가 서정적이고 처연하기까지 한 느낌은 지울 수가 없다. 내 앞에 거대하게 자리한 바다와 변화하는 계절에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연의 숭고함을 느끼며 유한한 인간의 삶에 대해 한 번쯤 사색을 해볼 수밖에 없다. 결국 우리는 매 순간을 이렇게 '여름밤'의 여인들처럼 춤추듯 만끽하며 보내는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계절이 바뀔 때마다 '이렇게 시간이 빨리 가면 어찌하나' 걱정이 들지만, 그중에서도 활활 불타는 여름이 끝나고 좀 차분해지는 가을을 맞이하는 이 시기를 잘 넘기고 싶다.

아직 나뭇잎이 너무 무성해서 이게 다 떨어지기는 할까 의구심이 드는 시기. 그러나 결국 하나의 주기가 마무리된다는 건 이미 잘 알고 있기에, 그렇게 우리를 힘들게도 설레게도 만든 더운 여름의 생생한 생명력을 의연하고 현명하게 떠나보낼 준비를 해야 할 때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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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현 OCI미술관장(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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