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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3 (금)

덩샤오핑 탄생 120주년…시 주석 체제하 鄧의 유산 희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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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의 집단지도체제, 파벌간 협력 등 부작용 명분으로 사라져

SCMP, 3회에 걸쳐 덩의 유산과 과제 등 분석

뉴시스

[선전=신화/뉴시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2020년 10월 14일(현지시간) 중국 남부 광둥성 선전의 롄화산 공원에서 덩샤오핑 동상에 헌화하고 있다. 2024.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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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구자룡 기자 = 중국 ‘개혁개방의 총설계사’ 덩샤오핑의 탄생 120주년(22일)을 맞아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그의 업적과 유산 등을 되돌아보는 분석을 3회에 걸쳐 게재한다고 22일 밝혔다.

첫 회는 덩과 시진핑 주석간의 통치 스타일 비교 등을 위주로 했다.

시 주석은 덩샤오핑 이후 가장 강력한 중국 지도자로 시 주석은 덩의 진정한 후계자로 여기지만 서구에서는 그는 덩샤오핑의 개혁을 해체한 사람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오히려 덩을 넘어선 마오쩌둥이나 청나라의 철권 황제 옹정제에 비교하기도 한다.

SCMP는 두 지도자는 전략과 접근방식에서 차이가 있지만 공산당의 생존을 결정하는 중요한 순간을 맞아 전임자들이 세운 관습과 길을 깨는 방식으로 반응한 점에서 비슷하다고 했다.

둘 모두 중국을 세계적인 강대국으로 회복하기 위한 열정적인 사명에 착수했다.

덩은 강대국이 되기 이해서는 스스로의 개혁 경로를 찾아야지 서방 모델을 맹목적으로 모방해서는 안된다고 경고했다.

‘왼쪽 지시등을 켜고 오른쪽으로 달리는 자동차’라는 해설이 붙기도 하는 ‘사회주의 시장경제 체제’의 도입이 나온 배경이다.

소련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개혁도 비웃었다. 덩샤오핑의 차남 덩즈팡은 친구에게 “부친은 고르바초프가 바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공산당 집권 원칙으로 4개 기본원칙을 견지했다. 사회주의 노선, 프롤레타리아독재, 공산당 영도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와 마오쩌둥 사상 등 4개의 ‘견지’다.

두 사람은 각기 다른 어려움과 상황에서 중국을 물려 받았으나 각자 독특한 접근 방식으로 대응한 점은 비슷했다.

덩이 집권했을 때는 10년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에서 막 벗어난 때였다. 사실상 무정부 상태로 당의 구조는 파편화되었고 이념적으로 분열되었다.

덩은 당의 이념적 내분을 끝내면서도 경제 성장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첫 번째 과제였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찾아낸 것이 집단지도체제였다. 다양한 파벌에 자리를 주는 합의 구축 메커니즘이다.

당의 최고 지도부인 정치국 상무위원 자리에서 칠상팔하(七上八下· 77세 이상만 남고 78세는 내려온다는 원칙)와 최고 지도부 처벌 않는다는 등의 불문율이 집단지도체제를 받치는 원칙들로 유지됐다.

이러한 규칙하에 권력을 공유하며 파벌간 협력이 이뤄졌다. 분열된 당을 재통합해 경제 개발에 집중하지 못하면 당의 통치 정당성이 흔들리고 국가의 생존도 불확실하다는 공감대가 있었다.

덩샤오핑의 이념과 파벌을 넘어선 실용주의를 보여준 것은 제11차 당대회 제5차 전원회의 폐막 연설의 말이다.

“회의는 짧아야 한다. 준비되지 않은 회의는 열지 말아야 한다. 회의를 하는 유일한 이유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다”

집단지도체제는 분열된 당을 화합시키고, 특정 파벌에 완전히 지배당하는 것을 막는 등 장점과 유용성이 입증됐다.

하지만 모든 제도에는 명암이 있다. 책임과 권한이 분산되다 보니 극도의 조심성과 무기력함, 당 규율의 붕괴로 이어졌다.

후진타오 주석은 정치국 상무위원을 7명에서 9명으로 늘렸는데 ‘비를 지배하는 아홉 마리 용’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권력이 공유되면서 아무도 폭우를 일으킬 만큼 강력하지 않다는 관용어를 언급한 것이지만 책임이 분산되자 당의 규율이 무너지고 부패가 만연해졌으며 권력남용과 불복종이 나타난 것으로 해석됐다.

시 주석의 ‘종엄치당(從嚴治黨·엄격한 당 관리)’는 이런 분위기에서 나왔다.

시 주석은 집권 직후 ‘파리에서 호랑이까지’ 잡는 대대적인 반부패 캠페인을 시작했다. 파벌을 무력화하고 최고 지도부 불처벌 원칙도 깨뜨려 저우융캉 전 상무위원이 처벌을 받았다.

당의 규율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시 주석의 권력은 공고해지고 덩이 마련한 원칙들도 하나 둘씩 무력화됐다.

헌법 개정으로 국가주석 연임 규정이 철폐됐고, 격대지정(隔代指定·차차기 최고지도자 지정) 원칙이나 집단지도체제도 무력화됐다.

덩의 유산은 사라지고 마오의 시대로 회귀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은 그 때문이다.

덩, 개혁개방과 톈안먼 유혈 진압의 두 얼굴


1904년 쓰촨성 광안에서 태어난 덩샤오핑은 국공 내전 중 1934∼1935년 대장정에 참가했다.

신중국 성립 후 부총리 등을 지냈으나 문화대혁명 때 밀려났다가 1978년 4인방을 제거하며 최고 권력자로 복귀했다.

1978년 개혁개방으로 방향을 튼 뒤 이듬해 1월 미국과 수교했고 수교 직후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미국을 방문해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미국에 화해 손짓을 하는 실용주의를 보여줬다.

1989년 민주화 운동을 유혈진압한 톈안먼 사태를 지휘했으나 1992년 2월 남순강화로 다시 한 번 ‘흑묘백묘(黑猫白猫)’의 실용주의 개혁노선을 주창했다.

평생 소망 중 하나였던 홍콩 반환을 5개월 가량 남겨두고 1997년 2월 사망한 덩은 유언대로 유골은 바다에 뿌려졌다.

☞공감언론 뉴시스 kjdragon@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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