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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2 (목)

출산 후 주거·양육 여전히 ‘막막’… 갈길 먼 보호출산제 [연중기획-소멸위기 대한민국, 미래전략 세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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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아 유기 문제 해결 목적으로 허용

베이비박스 위탁 10명… 2023년比 3배↑

불법양육 포기 여전… 실효성 우려 높아

시민단체 “미혼모 지원 확대 등 시급”

양육 기반 구축 정책 핵심 떠올라

임신기 홀로 생계 유지 지원 필요

“임신 축하금 형태 부모수당 바람직”

임신·출산 인식 개선 효과 기대도

사회·경제적 어려움에 놓인 위기임산부가 익명으로 출산할 수 있게 한 ‘보호출산제’ 시행 한 달간 ‘베이비박스’에 아동을 위탁한 이들이 되레 3배 늘어난 것으로 파악됐다. 영아 유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법 제도가 시행됐지만, 법의 테두리 밖에서 양육을 포기하는 사례는 여전하다. 전문가들은 아이를 키울 환경을 구축하지 않는 한 아동을 포기하는 가정은 계속 나올 것이라고 우려했다. 미혼가정 등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인정하는 문화를 마련하고, 이들이 아이를 양육할 수 있도록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보건복지부는 19일 “지난 한 달 동안 16명의 위기임산부가 아동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보호출산을 신청했고, 1명은 보호출산 신청을 철회했다”며 “제도 시행 전이었다면 놓쳤을 수 있는 소중한 생명을 살릴 수 있었다”고 밝혔다.

세계일보

서울 종로구 주사랑공동체교회에 있는 베이비박스 모습. 최상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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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제도권 밖에서 아이를 출산하고, 포기하는 이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주사랑공동체에 따르면 보호출산제 시행 이후 한 달간 이 단체가 운영하는 베이비박스를 통해 보호된 아동은 10명이다. 베이비박스는 양육할 수 없는 아기를 두고 갈 수 있는 시설로, 주사랑공동체가 운영하고 있다. 실제 처벌 사례는 없지만, 베이비박스에 아기를 두고 가는 건 엄연히 불법으로 유기죄와 영아유기죄로 처벌받을 수 있다.

주사랑공동체 관계자는 “보호출산제를 이용하면 정부가 (신원을) 알게 된다는 걸 부담스러워하는 경우도 있고, 제도를 모르는 사람도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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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별로 보면 전년 같은 기간에는 3명의 아동이 베이비박스에 맡겨졌는데, 올해는 3배 가까이 급증해 2022년(10명)과 같은 수준을 보였다. 지난해 정부가 영아 유기 처벌을 거론하면서 일시적으로 엄마들이 베이비박스 찾기를 주저했다가, 올해 다시 늘어난 것으로 풀이된다.

베이비박스에 보호되는 아동 수는 매년 감소하고 있지만, 미혼의 젊은 가정에서 베이비박스를 찾는 비율은 눈에 띄게 늘고 있다. 베이비박스 보호아동의 가정환경을 보면, 미혼 비율이 2020년 65.0%에서 올해 7월 90.9%까지 올랐다. 같은 기간 10∼20대 비율은 60.0%에서 87.8%로 증가했다. 홀로 아이를 키우기 어렵다고 생각해 양육을 포기하고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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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보호출산제가 아동 유기를 조장하지 않고 불가피한 상황에 선택하는 ‘최후의 수단’이 되게 하겠다고 밝혀왔다. 관련 단체들은 “지금은 출생 제도만 바뀌고, 임신·양육 제도는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고 제도의 한계를 꼬집는다.

김민정 한국미혼모가족협회 대표는 “보호출산제 시행 전에 정부는 미혼모 지원을 확대하겠다고 했지만 달라진 건 없다”고 비판했다.

정부가 손을 놓고 있었던 건 아니다. 한부모가족 지원을 담당하는 여성가족부는 올해부터 중위소득 60% 이하 저소득 한부모가족에게 18세 미만 자녀 1인당 월 20만원 지급하던 양육비를 중위소득 63% 이하, 고교 재학 자녀까지 월 21만원을 지급하고 있다. 보호출산제 시행에 맞춰서는 복지부의 지역상담기관을 통해 연계된 위기임산부가 한부모가족복지시설에 입소할 수 있게 했다. 기존에는 24세 이하 위기임산부에 한해 출산지원시설에 입소 가능했는데, 연령 제한을 폐지하고 입소 가능한 시설의 범위를 확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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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실효성이다. 시설에서는 단체생활을 하며 활동에 제약을 많이 받는 탓에 미혼모들은 임대주택을 선호하는데, 임대주택은 지난해 266호에서 올해 306호로 소폭 늘어나는 데 그쳤다.

양육비 지원은 모두 출산 이후에 주어져, 임신기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게 시민단체들 평가다. 미혼모는 다른 가족의 도움 없이 홀로 생계를 유지하는 경우가 많다. 임신 후 시간이 지날수록 활동이 어려워져 직장을 그만두거나 권고사직당하곤 한다. 소득이 끊긴 상태에서 주거비와 공과금을 내고, 젖병이나 배냇저고리 등 출산 후 필요한 물품을 준비하는 과정이 힘겹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경제적 어려움에 아이를 포기했다가 되찾아온 정수진(43)씨는 “하루 벌어 하루 먹기도 힘든 상황이 되면 ‘직접 키우는 건 내 욕심이다. 다른 부모 밑에서 크면 배를 곯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털어놨다.

전문가들은 ‘예비 부모수당’을 도입해 아이를 양육할 기반을 구축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오영나 한국미혼모지원네트워크 대표는 “지금은 아이가 태어나야 부모수당이나 양육수당을 부여하는데, 이를 임신기부터 지급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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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 부모수당은 일종의 ‘임신 축하금’ 역할을 해, 임신과 출산에 대한 인식 개선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목소리다. 한발 더 나아가 미혼가정도 홀로 아이를 키울 수 있다는 인식이 확산해 다양한 가족 형태를 인정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기대도 있다.

김민정 한국미혼모가족협회 대표는 “아이를 낳기로 결정한 엄마들이 힘들 날을 걱정하기보다 임신과 출산을 축하받을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예비 부모수당의 기대 효과를 강조했다.

조희연 기자 choh@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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