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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8 (일)

함경도 명란젓은 어떻게 일본 ’국민 음식’이 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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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조선의 먹거리 변천사

조선일보

음식조선

임채성 지음 | 임경택 옮김 | 돌베개 | 480쪽 | 3만2000원

일본의 ‘밥도둑’이자 특산 음식처럼 세계에 알려진 멘타이코(明太子)란 것이 있다. 우리는 명란젓이라고 부르는 명태 알이다. 그런데 20세기 초까지 일본엔 이런 음식이 없었다. 일본인은 명태라는 생선에 별 관심이 없었고, 다른 생선과 함께 어묵인 가마보코로 소비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1910년 이후 변화가 생겼다. 명태가 주로 잡히는 함경도의 음식, 명태 알을 소금과 고춧가루로 가공한 명란젓이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에게 알려져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됐다. 이제 이들의 주요 출신지인 서일본을 중심으로 명란젓이 소비되기 시작했다. 어업과 가공, 운송에서 근대적 변화가 일어났고, 조선인의 재래 어업과 일본인의 기선 저인망 어선 사이에 갈등이 벌어졌다. 태평양전쟁 때는 국가의 관리 품목이 돼 배급 통제가 이뤄지기도 했다.

이 책은 20세기 전 식민지 시기 조선의 식품과 음식 문화가 일본 ‘제국’ 전체의 푸드 시스템(food system) 속에서 어떻게 변화했고 주변과 영향을 주고받았는지에 대해 고찰하는 경제사 학술서다. 푸드 시스템이란 식료의 생산부터 유통·가공을 거쳐 소비 행위에 이르는 전 과정을 말한다. 일본 릿쿄대 경제학부의 한국인 교수인 저자는 대단히 치밀한 원자료 분석을 통해 이 책을 썼다. 식품 중에서도 쌀, 소, 홍삼, 우유, 사과, 명란젓, 소주, 맥주, 담배라는 아홉 가지 품목에 집중했다.조선에서 생산된 이 식품들은 일제에 의해 ‘제국’ 전체의 수요와 공급 계획에 따라 공장을 통한 대량생산 체제를 갖추게 됐으며, 위생 관리와 유통, 배급도 조직화됐다. 이 새로운 시스템 속에서 여러 식품은 격동을 겪었고, 일제 당국자들조차 예측하지 못한 변화가 일어났다.

왕성한 출산력과 씩씩한 생명력을 지녔다고 평가된 조선 소[牛]는, 비록 고기 맛이 썩 좋지는 않다고 여겨졌지만, 여전히 농경 사회였던 일본에서 환영을 받았다.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전반까지 일본 내 조선 소의 사육 두수가 전체의 15%에 이를 정도로 숱한 조선 소가 현해탄을 건너갔다. 한 일본인이 “하늘은 조국에 큰 목장을 은혜롭게 내려준 것”이라는 감탄까지 할 정도였다.

일본에서 유입된 서양 사과 역시 조선의 새로운 특산품으로 각광받았다. 국광·홍옥 같은 품종은 품질 개량을 거쳐 일본으로 건너갔다. 오사카 등 서일본에서는 경상도 사과와 아오모리 사과의 유통 거리가 비슷했기에 치열한 경쟁이 벌졌고, 만주와 화북에서는 조선 사과의 압도적 우위 상황이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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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를 수확하는 장면을 담은 '조선 풍속 그림엽서'. /돌베개


중국과만 거래가 이뤄졌던 홍삼은 대만, 필리핀, 인도차이나, 말레이반도, 인도네시아, 미얀마까지 수출지가 확장됐다. 저가(低價)를 유지했던 조선 담배는 전쟁 상황에서 소위 ‘대동아공영권’으로 확산돼 조선은 ‘제국’ 전체의 담배 생산 기지로 변모했다. 일찍이 조선에 없던 ‘맛’이 새롭게 조선인에게 소비되는 일도 일어났는데 바로 우유와 맥주였다. 북부 지방에서 주로 여름에 소비됐던 소주는 전국적인 유통망 구축 이후 남부 지방에서도 일상적으로 마시게 됐다.

그렇다면 이것은 일제가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힘쓴 결과일까? 그렇게 보긴 어렵다. 그들의 목적은 음식 산업 육성을 통해 총독부의 재정 기반을 확보하는 것과, ‘제국’ 전체의 수요를 위해 조선을 생산 거점으로 삼으려는 데 있었다. 조선 쌀이 서일본으로 반출되는 동안 조선 내의 쌀 공급에는 제한이 걸려 많은 조선인이 다른 곡물과 감자를 대신 먹어야 했다. 1인당 열량 지수는 1920년에서 1945년까지 절반 가까이 떨어졌고 성인 남자의 평균 신장은 1~1.5㎝ 작아졌다. 조선 소의 체격 역시 왜소화됐다.

결국 20세기 전반 ‘제국의 푸드 시스템’을 거치는 동안 조선 내에서 개발된 주요 식품들은 근본적인 변화를 겪었고, 이후 해방과 전쟁을 거치며 다시 한번 개편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것이다. 개별 식품들의 파란만장한 역사가 펼쳐지는 것은 흥미롭지만, 온갖 정치(精緻)한 숫자들이 나오고 숱한 조합과 협회들의 부침이 계속되는 본문을 읽다 자칫 개미지옥에 빠지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각 장(章)의 맨 끝, 별 세 개(***) 이후에 서술되는 소결론 부분을 먼저 읽는 것도 유효한 독서법으로 보인다.

[유석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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