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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28 (수)

원희룡의 몰락 [권태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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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국민의힘 전당대회 당대표 경선에 출마한 나경원(왼쪽부터), 원희룡, 한동훈, 윤상현 후보가 11일 오후 서울 중구 엠비엔(MBN) 스튜디오에서 열린 2차 당대표 후보 방송 토론회에 앞서 선전을 다짐하며 사진을 찍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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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호 | 논설위원실장



“편협한 국가정체성 이념에 비춰 자기 틀에 안 맞으면 전부 빨갱이로 본다. 전교조의 사학 장악 음모는 사실적 근거가 없다. (…) 과거 회귀적·대결적·관념적 이념 틀이 자리잡고 있다. 이건 ‘(이념) 병’이라고 생각한다.”



원희룡 전 의원의 지난 2006년 1월 ‘한겨레21’ 인터뷰 내용이다. 당시 사학법 장외투쟁을 이끄는 박근혜 대표를 강하게 비판했다. 당이 발칵 뒤집혔다. 최고위원회의에서 박 대표는 “원 최고는 거의 모든 문제에 열린우리당 생각을 대변해왔다. 아무리 민주화됐다고 하지만 말은 가려서 해야한다”고 싸늘한 눈빛을 보냈다. 이규택 최고위원은 “등에다 칼을 꽂았다. 내가 나가든지, 원 최고위원이 나가든지 둘 중 하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원희룡은 “당론과 다르다고 ‘해당 행위’라면, 나를 징계하라”고 맞섰다. 박희태 국회부의장과 김기춘 여의도연구소 소장이 화가 난 박 대표를 ‘잠시 옆방에 계시라’ 하고, 원희룡을 설득해 과한 표현은 사과하게끔해 간신히 무마했다. 그러나 원희룡은 그날 오후 기자회견을 열어 “내 소신엔 변함없다. 앞으로도 내 목소리를 낼 것”이라 했다. 2006년 원희룡이다.



“(보수 인사들과는) 소통이 없으면서, 김경율이나 진중권 교수 같은 정의당·참여연대 인사들과는 (소통이) 활발하다. (…) 민청학련 주동자였던 이모부 계시지 않냐. 통일혁명당 신영복 추모사에 앞장섰고, ‘좌파 언론’ 본거지 프레시안 설립자이면서, 이해찬 전 총리와 함께 민청학련 세대 대부 역할을 하는 분.” 지난 11일 국민의힘 전당대회 2차 토론회에서 원희룡 후보가 한동훈 후보에게 한 말이다. 앞서 ‘강용석 갤러리’ 등 극우 유튜브 방송 내용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2024년 원희룡이다.



‘흙수저’ 출신 원희룡은 학력고사 수석으로 서울법대에 들어왔다. 학생운동에 뛰어들어 정학을 당했고, 서울 구로공단에서 야학을 하고, 인천 숟가락 공장에 위장취업해 일당 2900원 노동자로 살기도 했다. 서울법대 수석입학생 중 이런 사람 없었다. 그러다 ‘동구권 붕괴로 큰 충격을 받고’, 인생항로를 수정해 사법시험에 또 수석합격했다. 2000년 한나라당 의원이 된 이후엔 늘 소장개혁파였다. 그런 원희룡이 당 주류로 등장한 건 2010년 사무총장이 되면서부터다. 앞서 2008년 ‘이상득 퇴진’을 주창한 남경필과 이에 반대하는 원희룡으로 갈라선 일이 먼저 있었다. 그러나 그때도 ‘원희룡은 원희룡’이었다. 2010년 오세훈 서울시장의 ‘무상급식 반대’에 ‘친환경 의무급식’으로 맞섰다. 2011년 이상득 의원 보좌관이 거액 로비자금 수수 혐의로 구속되자, “비리 앞에 성역 없다”며 이상득 의원 조사를 촉구했다. 이명박 대통령에 대해서도 “일방적이고 (여의도) 정치를 무시했다”고 비판했다. 2016년엔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지지했고, 2017년 1월 새누리당을 탈당해 개혁보수신당(바른정당)으로 갔고, 2018년엔 제주지사에 무소속으로 당선됐다.



그의 정치인생을 크게 보면, 처음 10년은 소장개혁파로 거침없는 목소리를 냈고, 이후 10년은 주류와 비주류를 오가며 때론 시류에 흔들리면서도 ‘개혁’ 위치를 완전히 이탈하진 않았다. 그리고 이때까지 국민들은 ‘전두환 세배’(2007년), ‘SD(이상득) 양자’(2010년) 논란에도 원희룡의 ‘개혁보수’에 기대를 걸고 계속 기회를 줬다.



원희룡의 마지막 기회가 지난해 7월이었다고 본다. 7월3일,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은 변경된 서울-양평 고속도로 노선 근처에 김건희 여사 일가 땅이 있다는 사실을 밝히며, 기자들에게 “‘늘공’(공무원)들이 정무 감각이 없어 의심받을 일을 생각없이 추진했다”며 “원점에서 재검토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사흘만에 갑자기 돌변해 ‘지역주민들 요구’라며 노선 변경을 밀어부쳤다. 야당을 향해 ‘나를 고발하라’, ‘정치생명을 걸겠다’며 급발진했다. 다들 어리둥절해 했다. 그러다 또 갑자기 “백지화”를 선언했다. 과거 ‘원희룡’에게는 ‘개혁’ 외에도 ‘합리적 온건 보수’ 이미지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 방송에서 원희룡 흉내내는 사람들은 모두 막무가내 주장을 펴고 씩씩거리며 거칠게 화내는 사람으로 묘사한다. ‘합리’도, ‘온건’도, ‘보수’도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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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6년 1월5일 서울 염창동 한나라당사에서 열린 최고·중진의원 회의에서 원희룡 최고위원이 “박근혜 대표의 사학법 이념투쟁은 병”이라고 ‘한겨레21’ 인터뷰 내용 등과 관련해 박근혜 대표를 비롯한 이규택 사학법무효화투쟁본부장이 원 최고위원의 해명을 기다리고 있다. 연합뉴스


2006년 당시, 거의 유일하게 당내에서 원희룡을 지지한 사람이 손학규 경기지사였다. “원 최고위원 같은 생기있는 소리가 나오지 않으면, 그것이 어떻게 야당이고 정치냐. ‘한나라당에도 저런 희망이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했다. 지금 원희룡은 ‘희망’인가. 2006년 인터뷰에서 원희룡은 “얼음은 계속 녹고, 봄날은 온다”고 했다. 2024년 오늘, 원희룡의 ‘봄날’이 이건가.



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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