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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24 (토)

리비아 근로자를 울렸다...산업화 세대의 순정 노래한 가수 현철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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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아 사막을 옥토로 만드는 대형 프로젝트 ‘리비아 대수로’ 공사. 1980년대 초 동아건설이 1차 공사를 독점 수주해 한국에서 근로자가 대거 파견됐다. 1987년 KBS 가요무대가 처음으로 리비아 사리르(Sarir) 건설 현장에 해외 촬영을 나갔다. 김세환, 조용필, 김연자, 최진희 등 특대형 가수를 이끌고 김동건 아나운서가 사회를 봤다. 가수 현숙이 첫 곡 ‘정말로’, 이어 나미가 ‘빙글빙글’을 불러 분위기를 띄웠다.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 떠오르는 당신 모습 피할 길 없는 내 마음.” 부산 출신 중년 가수 현철이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을 부르자 열사의 땅에 ‘눈물 비’가 떨어졌다. 몇 년씩 못 본 부모와 아내, 자식의 얼굴을 떠올리며 ‘중동 근로자’들이 울었다. 이어 ‘사랑은 나비인가봐’를 불렀다. 언제 울었냐는 듯 남자들이 노래를 따라 불렀다.(방송에는 이 노래만 나왔다.) TV 노출이 없던 현철의 인기에 제작진도 깜짝 놀랐다. 한국 가족들이 부친 ‘짜깁기 테이프’ 속에서 현철은 이미 인기 가수였던 것이다. “뒤쪽에 모르는 사람이 있어서 주현미씨랑 나는 ‘저분은 누구시지? 산업 역군이신가보다’ 했다니까.” 현철과 오누이처럼 지낸 현숙은 그의 소식을 접하고, 이렇게 추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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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 '봉선화 연정' 등 1980, 90년대 한국 트로트의 대표였던 가수 현철이 15일 오후 지병으로 별세했다. 오랜 무명을 거쳐 중년에 큰 인기를 얻은 그는 수그러들지 않는 가창력으로 유명했다. / 연합뉴스


산업화 시대의 주역, 그 세대의 우직한 순정을 노래한 트로트 가수 현철(본명 강상수)이 15일 오후 지병으로 별세했다. 수년 전 디스크 수술을 받은 뒤 신경 손상으로 건강이 악화해 오랜 기간 투병을 이어왔고 두 달 전 폐렴으로 중환자실에 입원했다고 한다.

1942년 경남 김해에서 태어난 현철은 부산 동성고 졸업 후 동아대 경영학과에 입학했으나 중퇴하고, 1966년 ‘태현철’이라는 이름으로 서울에서 음반 ‘무정한 그대’를 냈다. 하지만 남진과 나훈아가 점령한 가요판에 그의 자리는 좁았다. 부산으로 내려가 고군분투하다 작곡가 박성훈(73)과 기획사 사무실을 열었다. 1976년 레이프 개릿의 노래를 번안한 곡 ‘다 함께 춤을’을 비롯, ‘사랑은 나비인가봐’ 등이 들어간 음반이 ‘벌떼들’이란 이름으로 발매됐다. 이후 ‘현철과 벌떼들’로 활동하다 솔로로 독립했다.

‘사랑은 나비인가봐’ ‘내 마음 별과 같이’ ‘싫다 싫어’ ‘보고 싶은 여인’ 등 현철의 대표곡을 작곡한 ‘55년 인연’ 박성훈 씨는 현철을 “한국 가수의 생명력을 연장한 가수”라고 했다. “당시만 해도 서른이 넘으면 가수를 못 하는 풍토였는데, 집념 하나로 45세에 비로소 인기를 얻었다”고 했다. 꺾는 대목에서 정확하게 꺾어주는 창법이 현철식 트로트의 매력이다. 130곡 이상을 발표했고, 송대관·태진아·설운도와 함께 트로트 4대 천왕으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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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KBS가 방송한 가요무대 리비아 사리르 건설현장 공연 모습. 가수 현철과 근로자가 '사랑은 나비인가봐'를 함께 부르고 있다. /KBS유튜브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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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8월부터 7개월 방송된 드라마 ‘내 마음 별과 같이’의 주제곡으로 지명도가 높아진 현철은 1987년 리비아 공연 후 ‘전국구’ 스타가 됐다. “손대면 톡 하고 터질 것만 같은 그대 / 봉선화라 부르리 / 더 이상 참지 못할 그리움을 / 가슴 깊이 물들이고.” 화려한 장미가 아닌 시골 마당에 쉽게 피는 꽃으로 ‘중년의 순정’을 노래한 ‘봉선화 연정’은 1989년 최고 히트곡이었다.

“싫다 싫어 꿈도 사랑도 / 싫다 싫어 생각을 말자” ‘싫다 싫어’는 직장인들이 주정 대신 부르는 노래가 됐다. 두 곡이 잇달아 히트하며 현철은 1989년, 1990년 KBS ‘가요대상’ 대상을 2년 연속 받았다. 1998년 ‘사랑의 이름표’는 이전의 ‘순정남’ 콘셉트에서 한발 나갔다. ‘이름표를 붙여 내 가슴에 / 확실한 사랑의 도장을 찍어 / 이 세상 끝까지 나만 사랑한다면 / 확실하게 붙잡아’. 초등학생까지 부르는 노래이자, 선거 출마자들이 너도나도 달려드는 초대형 히트곡이 됐다.

“성공을 했지만 마음을 비우고 살겠다”고 약속한 그는 누구건 반겨주고, 성실하게 인생을 살았다. 셋이 합쳐 이름이 여섯 자밖에 안 되는 송해, 현철, 현숙은 여의도의 친한 친구들이었다. 현숙이 말했다. “아빠(송해)랑 오빠(현철)가 여의도 순댓국집에서 국 하나, 소주 한 병 시켜두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는데, 이제 두 분이 하늘에서 다시 만날 것 같다.”

중환자실에서 떠난 현철의 마지막 길은 부인 송애경씨와 1남 1녀, 손주들이 지켜봤다. ‘내 마음 별과 같이’를 함께 들었다고 한다. 부인은 이렇게 전했다. “말씀은 못 하시는데, 떠나기 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셨다.” 그 눈물에는 고생과 영광, 슬픔과 기쁨, 긍지와 안타까움이 녹아 있었을 것 같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1호. 발인은 18일 오전 8시 20분.

[박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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