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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7 (월)

[송호근의 세사필담] 이토록 잔인한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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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한림대 도헌학술원 원장 석좌교수


여름은 온갖 살아있는 것들이 응축한 힘을 한껏 분출하는 계절이다. 잎과 가지를 드높이 치켜올리는 나무 밑에 꽃들은 서로 화려한 색깔을 뽐낸다. 폭우에 꺾어진들 폭염에 시든들 개의치 않는다. 여름은 숨은 역량의 경연장이다. 더위에 지친 사람들이 결코 주저앉지 않는 이유도 그렇다. 찬물 한 사발로 온열을 식히면 땡볕으로 나갈 엄두가 난다. 폭우가 하천을 범람하고 도심을 침수시켜도 일 년 묵은 때와 얼룩을 씻어주리라 믿는다. 장마가 뒤엉킨 머릿속을 헹궈 후련한 시간을 열 것이다. 그래서 여름은 시련과 만족의 교차로다.

그러나 올해 이런 여름은 없다. 잔인하다. 미래를 기약했던 리튬전지가 애꿎은 생명을 앗아갈 줄 상상도 못 했다. 작업장에 갇힌 채 붉은 화염에 녹아내렸다. 며칠 뒤, 청운의 꿈을 가꾸던 모범 직장인들을 자동차가 덮쳤다. 애달파 눈물도 차마 흘리지 못했다. 저녁 무렵 직장인들에게 귀갓길은 사주경계의 피곤한 시간이 됐다. 아이스커피를 들이켜도 불안과 공포는 식지 않고 가족이 기대하는 바캉스는 불안한 어드벤처다.



자리 안 가리는 야당의 탄핵 남발

국가 존망을 덮치는 급발진 차량

용산 포격 매달리는 야당 탱크들

의료와 민생 붕괴는 안중에 없어

국회만 아니었다면 좀 나았을지 모른다. 국민이 뽑은 선량들은 이런 민심을 아랑곳하지 않고 밤새 싸웠다. 악몽의 현장엔 나타나지 않았다. 여의도 전사들에겐 오직 자기 두목이 관심사다. 충성심은 조폭을 능가한다. 개원식도 하기 전 국회가 온통 탄핵 깃발로 뒤덮인 나라가 지구 상에 있을까. 고대 플라톤 이후 금세기까지 모든 정치학의 도달점은 국가 존망이다. 군사력의 수장들, 검찰, 방송위원장을 가리지 않고 탄핵 단두대에 세우는 민주당의 탄핵 집착증이 정권을 넘어 국가를 덮치는 급발진 차량이 아니라고 누가 장담하랴.

3분 만에 통과된 해병대 특검의 창끝이 대통령에게 겨냥됐음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국회 법사위가 장군에게 발령한 얼차려는 대통령을 향한 구령이다. 민주당은 대통령 탄핵 청원에 서명한 사람이 100만 명을 넘어섰다고 으름장을 놨다. 법사위가 건조한 신형 로탱크(Law-Tank)는 바야흐로 대통령 집무실을 향해 돌진 중이다.

야당의 탄핵 작란(作亂)은 겨우 시작에 불과하다. 검찰과 언론을 묶어놓는 것은 본 게임을 위한 정지작업이다. 방송통신위원장 지명자는 취임도 하기 전에 탄핵 명단에 올랐다. 인터넷방송, 유튜브, 공용 방송에 이르기까지 정론을 위장한 궤변의 놀이터로 만들고 싶은 거다. 탄핵소추 명단에 오른 모(某) 부장검사의 사유는 ‘분변 사건’이었다. 울산지검 근무 당시 간부 식당에서 술을 마시고 민원인 대기실 바닥에 대변을 봤다는 것. 그는 쌍방울 대북 사건 담당 검사. 탄핵이 특정한 것은 대변이었다. 그러나 허위였음이 밝혀졌다. 이쯤 되면 국회에 똥 냄새가 진동한다. 아, 폭염을 이길 재간이 없다. 국민은 식은땀을 흘리는데 그대 선량들은 진정 재미있는가? 이 여름 우리는 ‘죽음의 계곡’에 들어섰다. 70년간 국민이 피땀으로 구축한 한국을 그대들은 무슨 권리로 패대기치고 있는가.

망하는 것은 순식간이다. 선량들이 즐겨 써먹는 ‘민생’의 핵심은 건강, 소득, 고용, 그중 100세 시대에 국민의 최대 관심사는 건강이다. 이 여름 가장 시급한 것이 한국 의료의 붕괴를 막는 것. 괜찮을 거라고? 아니다. 국민건강체계는 5개월간 붕괴가 상당히 진행됐다. 정부의 ‘묻지마 의대 증원’이 계기였는데, 이 위기 속에도 국회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국힘은 멍청한 상태고, 민주당은 손 놓고 반사이익을 노렸다. 최근 민주당은 덜 시급하나 실패가 뻔한 짐을 하나 더 얹었다. 공공의대를 설립하란다. 정당들이 진정 민생의 보루인 튼실한 보건의료를 구축하려 한다면 우선 할 일이 있다. 집 나간 전공의들, 의료체계의 초석인 전공의들을 어떻게든 불러들일 대안을 찾아 정부를 설득해야 한다. 환자단체가 뛰쳐나와 눈물로 호소하는데 그들의 비명이 애달프지 않은가?

다시 말하건대, 전공의가 빠진 병원은 운영 불가다. 필수 의료와 중증 진료는 절반도 해내지 못한다. 의대 교수들은 극한 피로에 몰렸다. 1만여 명 전공의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현 체제를 회복하는 데에만 족히 5년 세월이 걸린다. 적어도 5년 동안 중환자든 응급 환자든 적정 진료를 받을 수 없다는 뜻이다. 대기자 명단에서 죽어가는 환자가 속출할 것이다. 그나마 5년이 걸리면 다행이다. 의대생 유급이 곧 현실화하면 내년 의대 1학년 학생만 8000여 명을 헤아린다. 교수도 시설도 미비한데 의학교육이 이뤄질까? 내년엔 의대 졸업생이 제로다. 이후 이어지는 모든 충원의 사다리가 걷어차였다.

적자에 허덕이는 대형병원들이 일부 병실을 폐쇄했다. 정부는 강제 명령 철회, 수가 수정, 처우 개선을 약속하곤 있지만 이미 신뢰를 잃었다. 전공의들은 시간제 알바, 대리 기사, 배달 등 생계 전선으로 흩어졌다. 시민들이 흔히 하는 인사말 ‘밥 한번 먹자’가 ‘아프지 말자’로 뒤바뀐 이 여름에 정부는 때늦은 호소로 진땀 흘리고 정치권은 탄핵 칼날을 휘두르고 있다. 아, 잔인한 여름.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 한림대 도헌학술원 원장·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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