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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8 (금)

김한중 前 연세대 총장 “난 의사이자 암환자… 의정 치킨게임, 절망하는 사람 안보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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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개혁, 이제부터가 중요] [1] 김한중 前 연세대 총장 기고

조선일보

보건·의료계 원로인 김한중 전 연세대 총장은 의사 증원에서 비롯된 전공의 이탈 사태와 현재의 의료 파행에 대해 소회와 구체적 제언을 담은 기고문을 본지에 보내왔다. 연세대 의대 교수를 지낸 암 환자이기도 하다. 사진은 그가 연세대 총장 재직 시절 기자회견 하는 모습. /조선일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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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86. 50년 전 받은 내 의사 면허 번호다. 1977년 의료보험 도입, 복지 개념을 도입한 제5차 경제사회 발전 5개년 계획 수정, 전 국민 의료보험과 의료 전달 체계 동시 실시, 건강보험 통합, 2000년 의약 분업, 대통령 직속 의료발전특별위원회 구성, 수가(酬價·건보공단이 병원에 주는 돈) 산정을 위한 상대 가치 개발 등 굵직한 의료 전환점마다 가까이 있었다. 그리고 임상 의사들이 싫어하는 예방의학 전공자다. 그러나 정치인으로 변신하진 않았다. 의약 분업이나 규제 의료에 대해서는 반대 입장을 견지했고, 의료 현장의 소리를 전달하려고 애써왔다. 2000년 의약 분업 반대 파업 당시에도 환자의 생명이나 국민 불편을 담보로 해서는 안 된다는 시론을 기고하였다. 현재는 예후가 좋은 암종이긴 하나 등록된 암 환자이기도 하다.

한 방송의 유명한 앵커 오프닝 코멘트처럼 이번 의료 사태는 의대 증원 2000명이란 세상이 깜짝 놀랄 정부 발표에서 시작되었다. 엄청난 규모에 놀랐고 기습 작전 같은 전격성에도 놀랐다. 전공의들은 사직서를 내고 병원을 떠났고 학생들은 휴학 원서를 내고 학교를 떠났다. 정부는 각종 명령으로 전공의들을 압박했다. 사태 초기에 필자는 ‘제자들의 꽉 막힌 가슴을 뚫어 주십시오’라는 제목으로 대통령께 호소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전공의·의대생들의 답답함과 불신이 제거되지 않으면 현 사태는 빠른 시간에 해결되기 어려울 것이고 소통과 대화로 제자들의 꽉 막힌 가슴을 뚫어 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넉 달이 지난 지금, 전공의·학생들은 꿈쩍하지 않고 의대 교수들은 집단 휴진을 시작했으며, 의협은 집단 휴진과 대규모 항의 집회·시위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의·정(醫政)은 날선 공방으로 상대를 위협하는 치킨게임을 하고 있지만 실상 불안에 떨고 절망하는 사람은 환자와 국민이다. 의·정 갈등이 장기간 지속되면서 그 양상이 달라지고 있다. 정부와 일부 학자가 의사 증원 논리를 주장하는 과정에서 ‘의사 악마화’로 요약되는 거친 말들이 쏟아졌다. 의사들은 자존심이 상했고 진료하는 동안 민망해서 환자 얼굴도 볼 수 없다는 자괴감이 들 정도로 집단 분노에 빠져 버렸다.

더구나 장기화된 갈등 속에서 의사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언론은 물론이고 의사들에게 매달리는 환자들조차 사직, 휴진을 되풀이 발표하는 의사들에게 등을 돌렸다. 아무리 소통을 못하는 절벽 같은 정부라도 여론에 민감하며 여론에 따라 정책을 수정한다. 해외 직구 규제 철회나 고령자 운전 자격 제한 정책 철회가 그 예이다. 의사들이 병원과 학교를 떠나 그냥 누워버리지 않고, 환자 곁을 지키며 합법적인 투쟁을 했으면 어땠을까? 대표자들이 품위를 지켜가며 말 할 수는 없었을까? 교권 수호를 외친 교사들이 수업을 거부하고 거리로 나갔다면 그렇게 빠른 시간에 교권 회복 관련법들이 통과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동안 의료계는 너무 법적 판단에 의존한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있다. 최근 의대 정원 증원과 관련된 대법원 기각 결정 때 주심을 맡은 대법관이 국회 임명 동의 청문회에서 “의·정 갈등이 법원의 영역에 오지 않기를 바란다. 그전에 정치·사회 영역에서 타협해 해결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한 발언은 모두가 성찰해야 할 교훈이다.

격랑의 시기가 지나가면 평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순리다. 요즈음 돌아가는 의료 사태를 보면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지금 전공의, 학생들은 필자의 2세대 제자들이다. 반백년의 세대를 뛰어넘어 이들을 이해한다는 것은 애당초 무리라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MZ세대가 공정성, 합리성, 자신의 삶을 중시한다면 냉정하게 현실을 인식하고 미래를 결정해야 한다. 여러분들이 의과대학에 입학했을 때는 기쁨과 희망, 긍정의 마음으로 가득 찼겠지만 지금은 좌절과 포기, 분노로 가득 차 있는 듯하다. 여러분의 인생은 길게 남았고 다시 평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치미는 화 때문에 일년을 버리는 것은 자기희생일 뿐이다. 자발적 사직 또는 휴학이라고 하지만 ‘단일대오’란 압박감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

정부·사회도 이들의 복귀를 진심으로 도와야 한다. 우선 2025학년도 의대 증원은 돌이키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향후 5년간 매년 2000명씩 증원한다는 아직도 바뀌지 않는 정책에 대해서는 유연성을 발휘해야 한다. 둘째, 철회·취소라는 용어에 얽매이지 말고 전공의들 각자의 결정을 존중하고 어떤 결정을 내리든 피해가 없도록 해야 한다. 셋째, 의료개혁특위를 가속화하기 전에 의·정 협의체를 구성해서 여러 정책 현안을 논의해야 한다. 사회 각계 각층을 대표한다는 명분에 밀려 소수가 된 의료계의 의견은 무시되기가 쉽다. 소수 여당의 무력감을 보며 다수의 불합리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넷째, 언론은 ‘의사 망신주기’ 보도를 자제해 주었으면 한다. 의사들의 흠결을 자꾸 들추면 가라앉는 화도 돋우게 된다.

틱 낫한 스님은 ‘화(火)’란 책에서 우는 아이를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되고 따뜻하게 감싸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부도 의료계도 이 책을 함께 읽었으면 좋겠다.

☞김한중 前 총장은 누구

1948년생으로 1974년 연세대 의대 졸업 후 보건학 석사(연세대)·박사(서울대) 학위를 받았다. 1982년부터 연세대 의대 예방의학교실에서 학생을 가르쳤고, 2008~2012년 16대 연세대 총장을 지냈다. 현재 차병원그룹 미래전략위원회 회장 등을 맡고 있다.

[김한중 前 연세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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