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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1 (월)

“가챠~” 뽑기 기계로 향수 27만병을 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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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LY BIZ] [신현암의 ‘新도쿄견문록’] ‘절그럭’ 900엔 향수 뽑기, 사고의 전환으로 27만병 팔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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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노즈숍 X 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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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전을 넣고 레버를 돌리는 순간, 어떤 상품이 나올지 몰라 기대돼요. 뽑는 재미가 있어서 계속 하게 되는 것 같아요.”

국내 캡슐 장난감 자판기 전문점이 2030 여성에게 인기란다. 한국에서도 유동 인구가 많은 곳에 매장이 하나둘 늘며 신문 기사에 나올 정도로 화제가 됐다. 일본에선 이런 매장을 ‘가챠숍(뽑기 매장)’이라 부른다. 레버를 돌릴 때 ‘절그럭절그럭’ 소리가 나는데, 일본 사람들은 이 단어를 ‘가챠가챠’라고 표현하는 데서 유래했다. 딸이 어렸을 때, 함께 도쿄를 여행하다 보면 가챠숍을 자주 만났다. 그때마다 딸은 나에게 간절한 눈길을 보냈다. 동전을 꺼내지 않을 수 없었다.

뽑기 기계에 소형 향수를 넣은 사람이 있다. 2017년 ‘노즈숍(nose shop)’이란 향수 유통점을 오픈한 나카모리 도모노부(中森友喜)다. 그는 전 세계 17국, 50브랜드, 향수 700종을 라인업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종류가 많으니 고르기가 힘들다는 고객의 불만이 들렸다. 선택 장애가 발생하는 상품에 대한 처방전은 보통 다음과 같다. 판매량 기준 1~3등, 점원 추천 기준 1~3등 제품 리스트를 눈에 쉽게 띄는 곳에 놓는 것이다. 이렇게 6개 상품을 제시하면 고객 불만은 사그라든다. 노즈숍은 다른 생각을 했다. 향수 고르는 것 자체를 엔터테인먼트로 만들 수는 없을까. 향수 뽑기는 이런 발상의 전환에서 탄생했다.

한 번 돌리는 값은 900엔이다. 900엔을 내면 뽑기 기계에 넣을 수 있는 코인을 준다. 코인을 넣고 레버를 돌린다. 달그락 소리와 함께 작은 사이즈의 향수가 캡슐에 밀봉된 채 앞으로 떨어진다. 조심스럽게 캡슐을 열어본다. 짜잔~ 하고 작은 사이즈의 향수가 등장한다. 용량은 1.5ml 또는 2ml. 흔히 말하는 샘플 사이즈다.

일반적으로 향수의 용량은 10ml부터 500ml까지 다양하다. 많이 쓰는 용량은 50ml에서 100ml 사이. 금액은 한 병에 수십만원씩 하기도 한다. 지갑을 열기 부담스러운 금액이다. 반면 작은 사이즈는 채 만원이 안 된다. 게다가 뽑기 놀이의 즐거움까지 더한다. 2017년 9월부터 2022년 11월까지 27만개가 뽑기로 팔렸다.

작은 사이즈 향수를 뽑기 아이템으로 만든 건 향수 소비의 특성과도 잘 어울렸다는 평가다. 향수 전문가들은 이렇게 말한다. “블라인드로 구매할 때나, 선물용 등 특정 상황에서만 사용하려고 구매할 때는 작은 용량을 구매해야 한다. 이후 본인 취향에 맞는 향수를 발견했다면, 그리고 그 향을 본인의 시그니처 향으로 삼고 싶다면, 그때 가서 큰 용량을 구매하는 게 좋다.”

뽑기 기계도 다양하다. 초보자용, 취침용은 이해가 간다. 향수가 낯선 사람은 강한 향수에 거부감이 있을 것이고, 취침용은 뭔가 릴랙스한 느낌을 주는 향수를 모았을 것이다. 그런데 사찰(寺)용도 있다! 향나무 향 등을 활용, 마치 고요한 사찰에 있는 듯한, 마음 편해지는 듯한 느낌의 향을 모았다고 한다. 다음에 이 매장에 갈 기회가 있으면 이 뽑기 기계에서 고즈넉한 느낌의 향수를 뽑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노즈숍의 신선한 발상을 접하니, 소니의 일화가 떠올랐다. 소니는 1957년에 세계 최초의 ‘포케터블(Pocketable) 라디오’를 선보였다. 그때는 하얀 와이셔츠를 입고 출퇴근하던 시절. 소니는 와이셔츠 주머니에 쏙 들어가는 소형 라디오를 만들겠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크기를 줄여도 주머니에 넣기엔 한계가 있었다. 어떻게 했을까. 개발을 포기했을까? 아니다. 소니는 포케터블 라디오가 들어갈 만한 와이셔츠를 만들어 세일즈맨에게 입혔다! 노즈숍은 ‘선택의 고통을 줄이자’는 관점을 ‘즐거움을 만들자’로 바꿨다. 소니는 ‘라디오 크기를 줄이자’는 발상을 ‘호주머니 크기를 키우자’로 바꿨다. 혹시 우리는, 사고의 덫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볼 일이다.

조선일보

신현암 팩토리8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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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암 팩토리8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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