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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8 (금)

[만물상] “있는 그대로”의 진짜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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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일러스트=이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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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월 시 ‘진달래꽃’은 말하려는 참뜻과 반대로 말하는 작품이다.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는 실은 곱게 보내드리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반어법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 딸을 ‘미운 내 새끼’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말의 표현과 함의가 상반되는 현상을 연구하는 화용론(話用論)이 언어철학의 연구 분야인 걸 보면 엉뚱한 말 속에 진짜 속내를 숨기는 게 인간 본성인 듯하다.

▶일본에선 남이 한 말의 심중(心中)을 읽는 것을 ‘손타쿠(忖度)’라고 한다. 중국 고전 시경(詩經)에 나오는 ‘다른 사람 마음을 헤아려 안다’에서 왔다. 영어 ‘read between the lines(행간을 읽다)’와 비슷한 의미일 수도 있는데, 일본에선 권력자가 일일이 지시하지 않아도 아랫사람이 알아서 일을 처리한다는 뜻으로 변질됐다.

▶법정에서도 말의 속뜻이 논란이 될 때가 많다. 대표적인 게 위증 교사다. 위증죄는 기억에 반해 진술하는 행위다. 증인이 사실과 다른 말을 해도 기억에 어긋나지 않으면 위증죄가 안 된다. 위증 교사 혐의로 기소된 이들의 단골 멘트가 “(증인에게) 있는 그대로 말해 달라고 했다”인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그 말도 상황에 따라 듣는 사람에겐 ‘기억과 다르게 말하라’는 압박이 될 수 있다. 권력자가 그 말을 했다면 더 그럴 것이다. “있는 그대로 말해 달라고 했다”고 항변했지만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이 많은 것도 그 때문이다.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위증 교사’ 사건과 관련해 이 대표 육성이 담긴 녹음 파일이 공개됐다. 이 대표가 2018년 경기지사 선거 때 과거 ‘검사 사칭 사건’에서 “누명을 썼다”고 했다가 허위사실 공표 혐의로 기소된 뒤 증인 김모씨에게 거짓 증언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이 대표도 “있는 그대로 말해달라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녹음 파일엔 김씨가 “오래돼 기억이 안 난다”고 하자 이 대표가 “내가 변론요지서 하나 보내드릴게요. 기억도 되살려보시고”라고 말하는 대목도 있다. ‘있는 그대로’의 진실이 무엇인지 대충 짐작이 된다.

▶위증죄나 위증 교사죄는 내심을 확인해야 할 때가 많다. 그래서 위증 교사 사건에선 증언한 사람의 진술이 중요한데 증인 김씨는 이미 위증 혐의를 인정했다. “중압감 때문에 위증했다”고 증언했다. “있는 그대로”라는 이 대표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럼 오래 끌 사건이 아니다. 그런데도 법원은 기소된 지 8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1심 판결도 내놓지 않고 있다.

[최원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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