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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7 (목)

‘오늘 방 빼라’는 건물주…쪽방 주민은 폭염 거리로 내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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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20일 오후 서울 중구의 ㄱ고시원. 김영원 기자 forev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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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도 넘는 폭염 속 숨 막히는 열기가 장수현(74)씨의 쪽방에 스몄다. 성인 2명도 채 누울 수 없는 방 안에서 선풍기 2대가 덜덜거리며 돌아갔다. 장씨는 4년 전 오토바이 사고로 다리를 다쳐 화장실 대신 요강을 쓸 정도로 거동이 불편하다. 그래서 손 닿는 거리에 휴대용 선풍기와 부채 2개를 뒀다. 장씨가 오늘까지 방을 비우지 않으면, 이 방은 전기가 끊긴다. 선풍기도 멈춘다.



20일 서울시와 시민단체 2024홈리스주거팀의 설명을 종합하면, 장씨가 거주하는 서울 중구 회현동의 ㄱ고시원은 1960년에 지어져 2014년께부터 서울시 쪽방상담소가 관리하는 쪽방으로 지정됐다. 지난달 고시원장이 일을 그만두자 건물주가 5월25일과 6월12일 “건물의 노후와 부실로 인해 부득이 철거하게 됐다”며 20일까지 주민들에게 퇴거할 것을 요구했다. 방마다 ‘20일 이후부터 가스, 수도, 전기 중지됩니다’는 안내문도 붙었다.



장씨가 병원에서 받아온 약들로 가득한 방 한쪽에는 비워지지 않은 장아찌 반찬이 있다. 1달 만에 방을 빼야 한다는 막막함에 3일째 밥을 굶은 탓이다. 이곳 주민들은 쪽방상담소가 제공하는 동행식권으로 인근 식당에서 하루 한 끼를 받아올 수 있다. 쪽방상담소에서 생필품과 간호 서비스를 지원하기도 한다. 그나마 쪽방으로 지정돼 끼니를 해결할 수 있었기에, 주민들은 다른 곳으로 떠나기가 겁난다. 45개 방이 있는 이 고시원에는 이제 15명만 남았다. 떠난 주민들이 ‘지정된 쪽방’으로 갔는지 아닌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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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오후 서울 중구 ㄱ고시원 17호실 문에 건물주의 퇴거 안내문이 붙어 있다. 이곳에 살던 주민은 다른 곳으로 이사갔다. 김영원 기자 forev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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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들은 “방이 낡긴 했어도 철거까지 할 정도인지는 모르겠다. 건물주가 안전진단을 받은 상태인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지난해 3월 이곳에 들어왔다는 조병현(51)씨는 “옆 고시원에 살다가 그곳도 리모델링을 한다고 나가라고 해서 이곳에 오게 됐다. 이전에 살던 곳은 리모델링하고 방세를 올려 이제 외국인만 받고 있다”고 했다. 이동현 홈리스행동 상임활동가는 “(건물주가) 건물로 새로운 수익을 내기 위해 철거 후 용도 전환을 할 것으로 추정된다”면서 “그렇다 하더라도 주민들과 이사 기간에 대해 합당한 협의를 했었어야 한다”고 말했다.



장씨 옆방에 사는 곽민자(70)씨는 “다리가 불편한 장씨 대신 방을 알아보러 다녔는데, 몇 군데를 가봐도 환자라고 안 받아준다”며 “당장 떠날 수 없으니 단전·단수가 되면 복도에 나와 자고, 공중화장실에서 수건에 물 묻혀 씻을 생각”이라고 말했다. 10년째 이 고시원에 살았다는 남창학(61)씨는 선천적 심장질환, 녹내장을 앓고 있고 당뇨 합병증으로 발바닥이 괴사해 걸을 수 없다. 그는 “움직일 수 없는데 방을 어떻게 알아봐야 할지 막막하다. 정말 방법이 없으면 마지막 글 하나 올려놓고 이 세상을 하직하려고 마음먹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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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홈리스 주거팀 관계자들이 20일 오전 서울 중구 서울시청 앞에서 `폭염 속 강제퇴거에 내몰린 회현역 쪽방(고시원) 주민 대책 요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김영원 기자 forev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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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익인권법재단공감, 홈리스행동 등으로 이루어진 2024홈리스주거팀은 이날 서울시청 앞에서 대책 마련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주민들이 주택 임대차 보호법에 따라 보호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윤진 재단법인 동천 변호사는 “법률적 검토를 해본 결과 건물주의 퇴거 요구 자체가 법적 근거가 없다. ㄱ고시원은 주거용 건물에 해당하고 주민들은 주거 목적으로 계약해 전입 신고를 마쳐 짧게는 1년, 길게는 약 10년 동안 거주해 왔으므로 주택 임대차 보호법이 적용된다”면서 “설령 법이 적용되지 않더라도 ㄱ고시원의 계약은 민법상 기간의 정함이 없는 임대차에 해당하기에 퇴거 통보는 최소 6개월 전에 해야 효력이 발생해 1달 내에 퇴거해야 한다는 것은 법적 근거가 없다”고 말했다.



이어 이들은 “쪽방 주민 퇴거 위기의 이면에는 규제받지 않은 채 장기 방치돼 온 비적정 임대시장, 공공임대주택이 아닌 빈곤 비즈니스에 가난한 이들의 삶터를 맡겨버린 정부와 서울시의 책임이 자리한다. 서울시는 즉각 쪽방 주민 퇴거 사태에 개입해야 한다”고 밝혔다.



서울시 자활지원과 관계자는 한겨레에 “자활지원과는 주택 관리가 아닌 생활안정 지원 사업을 하는 곳이다. ㄱ고시원 주민들은 쪽방상담소를 통해 이사 지원, 생활자금 소액대출 서비스 등을 받을 수 있다”며 “주택 임대차 보호법의 적용을 받을 수 있는지는 법률적 검토를 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고나린 기자 m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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