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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0 (목)

[단독] 연락이 습격으로…‘광주교도소 조사’ 조작 정황 첫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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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5·18 항쟁기간 군용 지프를 타고 광주시내를 순찰하는 시민군. 한겨레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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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개입설’ 등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극우세력의 왜곡 근거로 악용됐던 ‘시민군의 광주교도소 습격’이 계엄당국에 의해 조작된 정황을 보여주는 5·18 당시 수사기록이 나왔다. 광주교도소 습격 사건은 전두환 반란세력이 5·18을 북한과 연계시키려고 조작한 사건이란 지적이 나왔지만, 여전히 그 실체와 진위 여부를 두고 명확한 결론이 내려지지 않고 있다.





“교도소에 연락”을 “교도소를 습격”로 수정





20일 한겨레가 확보한 1980년 전남합동수사단의 ‘용의자 조사 기록’을 보면, 당시 수사1과가 1980년 5월23일 오전 11시15분쯤 광주교도소에서 500m쯤 떨어진 북구 문화동 옛 광주자동차학원 앞길에서 카빈총 1정을 휴대한 채 소방차에 타고 있던 시민군 한기원(28) 등 5명을 붙잡아 조사하면서 이들의 교도소 방면 진출 목적을 처음 진술한 것과 다르게 고쳐 적은 정황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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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합동수사단이 작성한 교도소 습격 용의자 조사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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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 진술은 “넝마주이가 교도소를 습격한다는 신고 접수”를 듣고 “교도소에 연락하겠다고 자원하여” 총기를 인수해 소방차를 타고 교도소 방면으로 갔다는 것이었으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교도소에 연락하겠다고 자원하여”라고 쓴 부분을 두 줄로 긋고 나서 “교도소를 습격할 목적으로 출동을 자청하여”로 수정한 것이다. 정수만 전 5·18유족회장은 “이는 합동수사단 조사 과정에서 한기원의 진술을 번복·정정하도록 했을 가능성이 있는 대목”이라고 말했다.



전남합수단의 ‘조사계획서’에서도 ‘넝마주이 30명 교도소 습격신고 사항을 듣고 교도소에 연락하겠다고 자원하여’라는 글씨 위에 삭제 선을 긋고 ‘넝마주이와 합세해 습격할 목적으로 자진출동을 자청하여’로 문구가 바꿨다. 이후 소방차에 탔던 한승원과 정성영 등 2명은 ‘집단 소요 행위’ 등으로 처벌받았고, 나머지 3명은 단순가담자로 분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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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밝힌 교도소 습격사건 관련 일지. 조사위 자료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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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인 5명이 카빈총 1정 들고 교도소 공격?





당시 단순가담자로 분류됐던 심영의는 지난 2019년 10월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소방차에 탔던 일행 5명 중 4명이 비무장 상태였고, 차에 있는 총 한 정에도 실탄이 없었다”며 “옛 동일실업고 앞에서 집중사격을 받고 체포된 뒤 군인들이 ‘교도소 습격범이라는 사실을 자백하라’며 폭행하고 고문해 정신을 잃었다”고 회고했다. 심영의는 교도소 습격 사범이 아니라는 사실이 입증돼 108일 만에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이들의 행동이 ‘습격’이 아니었다는 것은 당시 광주교도소에 근무했던 교도관의 진술에서도 드러난다. 노상대(46) 당시 광주교도소 보안과장도 1980년 8월13일 검찰 참고인 진술에서 “그날 오전 11시15분경 소방차에 폭도 5명이 승차하여 사전 정찰하러 교도소 방향으로 오는 것을 체포했다고 (기록에) 기재되어 있다”고 답변했다. 계엄당국의 주장처럼 교도소 습격이 사실이라면, 압도적 화력으로 무장한 계엄군과 경비병력이 주둔한 교도소를 고작 카빈총 1정을 든 민간인 5명이 공격하려고 했다는 것이 된다. 한마디로 난센스다.



전두환 반란세력이 광주교도소 주변에서 있었던 계엄군의 총격을 시민군의 교도소 습격으로 조작하려 했던 정황은 이밖에도 많다. 특히 보안사령부(현 국군방첩사령부)의 전남분소인 505보안대는 5월21일 도청 앞에서 계엄군 총격을 받아 숨진 유영선(당시 29살)이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광주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형 유낙진(2005년 사망)을 구출하려고 광주교도소를 공격하다 숨진 것처럼 왜곡·조작을 끊임 없이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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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판매대금을 수금하기 위해 광주에 왔다가 계엄군이 쏜 총에 맞아 사망한 고 임은택씨의 아내 최정희씨가 17일 오전 국립5·18민주묘지에서 묘를 쓰다듬고 있다. 정대하 기자




소 판 돈 받아가다 총 맞아 숨진 민간인을 ‘습격범’ 조작





무고한 민간인을 교도소 습격범으로 조작한 사건은 또 있다. 전남 담양 대덕면에 살던 임은택은 소 판매 대금을 수금하려고 이웃 주민 고규석(37), 이승을(40), 박만천(나이 미상) 등과 픽업트럭에 타고 광주에 갔다가 5월23일 집으로 돌아가던 중 광주교도소 인근 호남고속도로에서 계엄군의 총격을 받았다. 임은택·고규석은 현장에서 사망했고 이승을·박만천은 가까스로 목숨을 구했다. 지난 17일 국립5·18민주묘지에서 만난 임인택의 부인 최정희(77)씨는 “남편에게 교도소를 습격한 폭도 누명을 44년간 씌웠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무엇보다 ‘교도소 습격사건’으로 계엄당국에 의해 지목된 5건 가운데 실제로 교도소를 공격한 사례는 한 건도 확인되지 않았다. 1996~97년에 있었던 12·12, 5·18 재판에서도 1심은 ‘교도소 습격은 없었다’고 판단하고 광주교도소 주변에서 발생한 서종덕(20)·이명진(38)·이용남(26) 등 3명을 향한 계엄군의 총격에 ‘내란목적살인죄’를 적용했다. 하지만 2심과 대법원 상고심은 당시 계엄군 발포를 정당방위로 인정하고 원심과 달리 무죄를 선고하면서 논란이 정리되지 않았다.





조사위 ‘습격설’ 판단 없이 “북한군 개입 없었다” 결론만





광주교도소 습격과 관련한 법원 판단은 지만원 등 극우세력에 의해 ‘북한 개입설’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끝없이 악용됐다. 이 때문에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조사위)에서 반드시 진실을 확정해야 할 과제였지만, 조사위는 ‘조사기한이 촉박했다’는 이유로 교도소 습격설의 진위에 대한 판단 없이 “지만원 등이 주장한 북한군 개입은 없었다”는 결론을 내리는 데 그쳤다. 조사위가 ‘교도소 습격사건이 5차례 있었다’는 당시 전남합동수사단과 보안사령부 505보안대 기록 등을 근거로 ‘북한군 투입설’의 진위 규명에 나선 결과였다.



조사위 관계자는 “임인택·고규석씨 등 민간인들이 이동 중 교도소 인근에 배치된 계엄군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는 것으로 바로잡았다. 다만 이 사안의 핵심은 민간인과 시위대가 교도소를 습격할 의도가 있었느냐를 밝히는 것인데, 조사 기한이 충분하지 않아 단독 과제로 조사하지 못해 아쉽다”고 말했다.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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