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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3 (목)

"무턱대고 귀농하면 실패… 직접 재배하고 배우는 경험 필요" [귀농귀촌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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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민 함안농부협동조합 이사장

그의 도시생활은 스트레스의 연속이었다. 사람간의 관계를 맺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미래도 밝지 않았다. 도시에서의 결혼 생활과 육아에 자신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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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민(43) 경남 함안농부협동조합 이사장이 32살에 귀농한 이유다. 박 이사장은 청년농부다. 귀농한 후 지난 10년간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았다. 흙과 함께 청년시절을 보냈다. 8일 만난 김 이사장은 인터뷰 내내 웃고 밝은 모습이었다. 시골생활 만족하느냐는 질문에 “여긴 공기가 다르다”며 맑은 하늘을 가리켰다. 그랬다. 주변을 보니 신록이 우거진 숲과 하늘은 구름 한점없이 파랬다. 자동차로 한 시간만 나가면 나오는 도시와는 크게 달랐다.

귀농하기전 박 이사장은 요리사였다. 박 이사장은 고교를 졸업하고 요리를 배우기 위해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3년 과정의 조리전문학교에서 일본 요리를 공부했다. “일본에서 취업하고 살 생각으로 유학을 갔어요” 그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뭐든지 열심히 했다. 연수를 하던 일본의 한 호텔은 박 이사장의 근면·성실함을 눈여겨 봤다. 호텔에서는 그를 요리사로 채용하고 싶어 취업 비자 발급 절차를 밟았다.

하지만 그는 일본에서 취업의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 일본이 자국민 일자리 보호를 위해 요리와 미용, 애완견 분야에서는 외국인 취업을 법으로 막고 있어서다.

결국 그는 2008년 일본 생활을 접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경남 창원 한 레스토랑의 일본 요리사로 취직했다. 이 레스토랑의 서울 본사에서 1년간 근무하던 그는 총괄쉐프와 함께 국내 굴지 외식업체로 자리를 옮겼다. 근무지는 VIP의전팀 요리 담당이었다. “너무 힘들었어요. 사람간의 스트레스로 하루하루가 긴장의 연속이었어요” 박 이사장은 당시 업무 압박감으로 병이 날 정도였다고 했다. 그는 자신이 조리한 요리를 먹은 VIP의 한 마디에 온 신경이 쓰였다고 당시의 중압감을 떠올렸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가 귀농을 결심하게 된 이유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도 가족이 같이 보내는 시간이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50대에 하려된 귀농을 앞당기기로 했다. 귀농하기 위해 2012년 10월 퇴사를 했다. 32살에 청년 농부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원래 귀농하려는 곳은 경남 함양이었다. 결혼을 약속한 예비 신부의 고향인 전북과 자신의 고향 창원의 중간지점이 함양이기 때문이다. 함양은 산세가 너무 심해 그 옆인 함안으로 귀농지를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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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 후 곧바로 함양으로 내려와 농사를 지었다. 퇴사하고 바로 내려오니 그 마을사람들이 양파를 파종했다. 박 이사장도 밭 600평에 양파를 심었다. 농사의 ‘농’자도 모른채 동네 사람들을 따라서 한 양파 농사의 결과는 뻔했다. 종자값도 건지지 못했다.

박 이사장은 귀농 후 결혼했다. 식구가 늘었지만 마땅한 수입이 없어 퇴직금 통장은 날마다 줄어들었다. “참깨 농사에 손을 댔어요” 그는 농지를 임대해 참깨를 심었다. 참깨는 매년 가격이 일정한데다 수입산 가격도 오르면서 가격 폭락을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판단이었다.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5년 가량 참깨 농사로 생계 유지가 가능했다.

박 이사장은 귀농인에게는 그 흔한 동네사람과 갈등을 겪지 않았다. 귀농 후 아이가 태어나는 바람에 마을사람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았기때문이다. 이 마을에서 23년 만에 아기 울음소리가 나왔다. “동네분들이 날마다 아기를 본단고 뭘 싸들고 왔어요” 박 이사장은 이후 아이 둘을 더 낳았다. 동네 사람들은 마을에 경사났다며 박 이사장에게 거리를 두지 않고 이웃으로 받아들였다. 아이들 덕분이었다.

박 이사장의 귀농 터닝 포인트는 2017년 협동조합 설립이다. 그는 양파 농사를 망친 이후 농업기술센터를 다녔다. 그 곳에서 귀농인 교육생 5명을 만났다. 이들과 농장을 서로 방문하고 토론하면서 “뭔가 하자”는 의기투합이 됐다. 그 결실이 협동조합 설립이었다.

수익을 내자는 게 아니었다. 지역 먹거리 공동체를 한번 살려보자는 취지가 강했다. 그래서 처음엔 조합원 5명이 각자 짓는 먹거리를 체험농장에서 판매했다. 한 공간에서 블루베리와 메론, 단감, 절임배추 등을 판매하고 체험하는 공간을 운영했다.

그러다가 지난해 농업진흥청 공모사업에 농산물 가공공장이 선정됐다. “곡물로 다양한 제품을 만드는 공장을 만들었어요” 가공공장에서는 곡물로 튀밥 등 다양한 곡물 가공식품을 생산하고 있다. 소문이 나면서 올해는 제법 수익을 내고 있다.

협동조합의 또 하나 축은 함안승마장위탁사업이다. 승마장은 체험과 숙박시설을 갖추고 있다. 이날도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제과와 제빵 체험 학습이 한창이었다. 이 곳에서 박 이사장 부부는 다시 요리에 손을 댔다. 베이커리와 승마 체험을 묶음으로 하는 상품이 인기다. 제빵과 승마 체험을 함께 할 수 있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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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동조합은 어느새 강소기업의 모양을 갖췄다. 조합원은 12명으로 늘어났고, 정규직 직원만 4명이다. “조합의 일이 늘어나면서 직원들이 필요했어요” 박 이사장은 조합원 각자 생업이 있어서 조합일만 꾸려가는 직원이 필요했다고 한다.

협동조합의 공동 브랜드는 ‘별별농부’다. 다양한 의미가 담겨있다. 별의 별을 일을 다한다는 뜻과 별을 보고 출근해 별을 보고 퇴근한다는 일벌레 등의 의미가 내포돼 있다.

협동조합의 목표는 수익을 창출하는 귀농인들의 보금자리 역할을 하는 것이다. 또 성공한 귀농인 모델이 되는 것이다. 그는 이같은 목표 달성을 위해 예비 귀농인들의 가이드를 하고 있다. 귀농을 문의하는 그들에게 그는 솔직한 경험담을 들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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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이사장은 예비 귀농인들에게 무작정 귀농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잘 되겠지하는 마음으로 무턱대고 귀농하면 반드시 실패해요” 그는 적어도 귀농하기전 1년간 귀농해서 무슨 작물을 재배할 것인지 꼼꼼하게 준비하라고 주문했다. 재배할 작물이 선정되면, 그 작물의 주산지에서 직접 재배하고 배우는 경험이 필요하다고 권했다.

그는 또 청년농부의 전망은 밝다고 했다. “청년이 농촌에 살면 도시보다 기회가 더 많아요” 농촌의 고령화로 임대를 할 수 있는 농지가 많고 지자체의 지원 정책도 다양하다는 것이다. 농촌은 청년농부가 둥지를 틀 수 있는 블루오션이라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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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한현묵 기자 hanshim@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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