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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단독] ‘구속영장 기각’ ‘솜방망이 선고’에... 두번 우는 스토킹 피해자 “블랙코미디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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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아직도 그날 ‘몰래 카메라’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지금 제가 어떻게 됐을지 상상하기도 싫을 만큼 끔찍하다” “스토킹 피해자로서 평생 안고 갈 심각한 트라우마가 생겼는데 이런 것은 왜 몰라주는가”

한 평범한 여성 A씨에게는 ‘2023년 11월 10일’이 평생 잊을 수 없는 끔찍한 날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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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이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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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는 그날 밤 11시쯤 귀가해 불을 끄고 누웠다가 창가 쪽에서 수상한 물건을 발견했다. 창가 커튼에 가려져 파란색 불빛을 내뿜으며 충전 중이던 보조배터리였다. 평상시 보조배터리를 써본 적 없는 A씨는 의아하다는 생각으로 112에 신고를 했다. A씨는 출동한 경찰과 함께 관리사무실로 동행해 집 주변 CCTV를 확인해봤다.

CCTV 영상을 확인한 A씨는 큰 충격을 받았다. 마스크와 모자를 쓴, 모르는 남성이 그날 오후 6시쯤 태연히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고 A씨 집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찍혀 있던 것이다. 영상을 계속 돌려보니, 작년 9월 22일 귀가하던 A씨 뒤를 쫓아와 눈치를 보며 바로 옆 엘리베이터를 타던 이 남성의 모습이 발견되기도 했다. 당일 A씨는 정체 불명의 보조배터리 주인으로 추정되는 이 남성을 경찰에 신고했다.

그런데 신고 사흘 뒤인 작년 11월 13일, 이 남성은 제 발로 경찰서를 찾아왔다고 한다. A씨 집에서 발견된 보조배터리에 ‘몰래 카메라’가 내장돼 있었고, 이를 통해 경찰 출동 상황과 CCTV 확인 과정 등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던 이 남성이 사흘간 전자기기 사용 내역을 모두 초기화한 뒤 변호사를 대동하고 경찰서를 방문했다는 것이다. 경찰은 이를 ‘자수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경찰 조사 결과, 이 남성은 A씨와는 일면식이 전혀 없는 진모씨(40대)로 밝혀졌다. 진씨는 작년 7월쯤 자신의 여자친구 집 창문을 통해 맞은편 건물에 거주하던 A씨를 처음 발견한 뒤부터 그해 11월 10일 범행이 발각되기 전까지 총 15차례에 걸쳐 A씨를 스토킹 한 혐의 등을 받았다. 진씨는 창문 너머의 A씨를 불법 촬영하거나, A씨 집 앞에 카메라를 설치해 현관문 비밀번호를 알아내고 수차례 집 안에 침입해 머무른 것으로도 조사됐다.

하지만 경찰은 진씨를 곧바로 체포하지 않았고, 신고 2개월 만인 올해 1월이 돼서야 진씨에 대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이마저도 법원에서 기각됐다. 법원은 진씨에 대한 구속영장을 돌려보내면서 “진씨는 사회적 유대관계가 있으며 부모의 도움을 받고 있다. 현재는 (A씨가 살고 있는 곳과) 다른 지역으로 이사갔다”며 “진씨는 피해 배상을 할 의사를 강하게 표명하고 있으며 그럴 경제적 여력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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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6월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제407회 국회(임시회) 제6차 본회의에서 스토킹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이 통과 되고 있다.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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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가 지난 2월 이런 상황을 보도하자, 경찰은 2월말 두번째 구속영장을 신청했고 법원은 진씨의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그전까지 A씨는 얼굴도 모르는 진씨가 집을 찾아와서 해코지하지는 않을지, 불법 촬영 영상이 유포되지는 않을지 매일 불안에 떨며 살아야 했다. 스토킹 가해자가 2km 이내 접근 시 피해자에게 문자 메시지로 알려주는 위치 추적 ‘잠정 조치’도 A씨 스스로 신청했다.

이후 검찰은 지난 3월 7일 스토킹처벌법 위반, 성폭력처벌법 위반, 주거침입 등 혐의로 진씨를 구속 기소했다. 검찰은 지난 3월 27일 열린 첫 재판에서 진씨에게 징역 5년을 구형했다고 한다.

하지만 1심 법원은 지난달 24일 진씨에게 징역 2년을 선고했다. 검찰 구형량의 절반도 미치지 못한 것이다. 1심을 맡았던 의정부지법 고양지원 형사8단독 이정훈 판사는 진씨에게 유리한 사정으로 “피해자(A씨)가 피해 사실을 인지한 작년 11월 10일 이전에는 불안감, 공포심 유발의 정도가 크다고 보기 어렵다”며 “진씨는 아무런 범죄전력 없는 초범이고, 이 사건 범행을 인정한다”고 판결문에 적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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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지방법원 고양지원./조선DB


이에 대해 A씨는 “(첫번째 구속영장이 기각됐을 때) 어떠한 사과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 피해자인 저를 배제하고, (진씨와 법원이) 피해 배상을 운운하는 것 자체가 제겐 블랙코미디 같았다”고 말했다. ‘경제적 여력이 있다’는 이유로 첫번째 구속영장을 기각한 법원 판결을 지적한 것이다. 1심 선고 이후에는 “일면식도 없는 생면부지의 남성이 몰래, 작정하고, 들키지 않도록, 지속적이고, 계획적으로 한 범행”이라며 “피해자가 빨리 눈치를 못 채서 그전까진 불안감이나 공포심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라는 설명을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했다.

진씨는 1심 판결에 불복해 지난달 30일 항소했다. 검찰도 같은 날 “범죄가 중대하고 죄질이 불량하며 피해자가 처벌을 희망하고 있다”는 등의 취지로 항소했다. 2심 법원이 진씨 사건을 다시 들여다 보게 되는 것이다.

[이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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