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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4 (토)

[태평로] ‘닥터 캐슬’ vs ‘검사 캐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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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법대 검사, ‘의대 광풍’ 의사

“공부 제일 잘해” 엘리트주의 빠져

독선·선민 있고 봉사·희생 안 보여

자기들만의 ‘城’, 국민이 허물 것

윤석열 대통령이 대학에 들어간 1979년 입시는 예비고사 성적 비중이 높았다. 애초 예비고사는 대학별 시험(본고사)을 치를 자격을 주는 시험이었지만 갈수록 그 점수가 당락을 결정했다. 문·이과 공통이었다. 당시 신문을 보면 1979년 서울대에서 합격 평균점이 가장 높았던 계열은 법과대(300.83)였다. 경영대(300.10)와 사회대(298.04)가 뒤를 이었다. 의대(294.76)는 네 번째였다. 인문대·공대·자연대가 치의대·약대보다 예비고사 평균은 더 높았다. 본고사에선 문·이과 구별이 있었지만 예비고사 점수만 보면 의·치·약이 1등은 아니었다.

1990년대까지 서울대 법대 전성기였다. 신임 판검사의 절반을 배출했고 대법관이나 검사장급으로 올라가면 그 비율은 60~80%대로 뛰었다. 법대 출신들은 ‘공부 제일 잘했다’는 엘리트 의식이 강했다. 특히 검사가 되면 ‘검사 동일체의 원칙’을 따른다며 독특한 집단의식으로 뭉쳤다. 검찰총장을 정점으로 상명하복으로 움직이며 자기들만의 ‘성(城)’을 쌓았다.

1997년 IMF 금융 위기가 우리 사회를 송두리째 흔들었다. 그전만 해도 이과 1등은 서울대 물리학과나 전자공학과 등에 진학하는 경우도 많았다. 당시 부모 중에는 ‘온종일 책상에 앉아 아픈 사람 보는 게 좋으냐’라는 말도 했다. 그런데 IMF 직후 서울대 공대를 나오고도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돼 버린 사람들이 속출했다. 반면 무슨 대학이든 의대만 나오면 별 영향 없이 부를 쌓았다. 자격증이 있어야 생존한다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2000년 대입부터 의대 인기가 치솟았다.

2009년 사법시험을 대신할 로스쿨이 시행됐다. 변호사 수가 크게 늘면서 수입과 인기가 내려갔다. 1977년 이후 의대 정원이 1380명에서 3058명으로 2.2배 증가한 동안 매년 뽑는 변호사 수는 58명에서 1725명으로 30배 늘었다. 2018년엔 서울대 법대도 없어졌다. 지금은 전국 1등부터 3058등까지 의대 정원을 채운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의대 전성기다. 진료를 거부하고 있는 전공의(인턴과 레지던트)들은 2010년대 학번들인데 초등학교 때부터 수재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의대생들도 졸업 후 전공의·전임의·전문의 등을 거치며 자기들의 ‘성’을 쌓는다.

서울대 법대와 의대 공통점은 또 있다. 보통 무슨 학과 출신이냐고 물으면 문과생은 국문과·정치학과, 이과생은 물리학과·전자공학과처럼 구체적인 학과 이름을 댔다. 그런데 법대와 의대생들은 법학과, 의예과 같은 학과명이 있는데도 꼭 “법대” “의대”라고 답했다. 자신들은 뭔가 다르다고 강조하는 것 같았다. 서울대 법대를 나온 한 검사는 모시던 검사장이 불명예 퇴진하자 ‘그의 호위 무사였다’고 적었다. 국민을 지켜야 할 검사의 칼로 자신의 대학·검찰 선배를 호위한 것이 ‘긍지’라고도 했다. 최근 의대 증원 백지화를 요구하는 일부 전공의들은 “군의관 복무 기간을 단축하라”고까지 했다. 모두 자기들 성 안의 이해관계만 따질 뿐 국민은 안중에도 없다.

학교에서 1등만 하던 검사나 의사일수록 엘리트주의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능력이 뛰어난 소수의 엘리트가 다수 사람을 지배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능력주의를 신봉한다. 그런데 우리 엘리트들은 자신만이 옳다는 독선과 선민의식에 자주 빠지곤 한다. 가장 중요한 ‘대중에 대한 봉사와 희생’은 안 보인다. ‘검사 캐슬’과 ‘닥터 캐슬’ 안에서 하던 대로 버티면 이긴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성벽만 쌓고 소통과 타협의 길을 내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분노한 사람들이 닫힌 성부터 휩쓸어 버릴 것이다.

[안용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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