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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27 (토)

응급실의 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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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아무튼, 봄’ 희망 편지] (7)

소아응급실 한구석에는 아주 귀여운 이름의 기계가 있습니다. ‘베어 허거(Bair Hugger)’라는 이름의 체온 유지 장치입니다. 응급실에서 일하는 저희는 그 작고 길쭉한 기계를 ‘베어(Bear)’라고 줄여 부르기도 합니다. 우리말로 옮기자면 ‘안아주는 곰’ 정도가 될까요? 참 사랑스러운 이름이지요. 소화기보다 약간 큰 몸통에 마치 청소기 호스처럼 생긴 긴 관이 연결되어 있어 전원을 켜면 따뜻한 바람이 호스를 통해 불어져 나옵니다. 그 끝을 이불 속에 넣으면 데워진 공기로 이불이 볼록하게 부풀어 오르는데, 옆에서 보면 정말 웅크려 잠든 아기 곰 같은 모양이 됩니다.

성인에 비해 체구가 작고 호흡이 빠르며 체내 수분의 비중이 큰 아이들에게는 체온 유지가 아주 중요합니다. 특히 신생아는 체온이 조금 떨어지는 것만으로 수시간 만에 생사를 넘나들기도 할 정도이니까요. 서로의 피부를 맞대고 체온을 나누며 안아주는 것에는 넉넉한 치유의 효과가 있기 때문에, 쌍둥이로 태어난 미숙아들을 같은 인큐베이터에 함께 둠으로써 살려낸 일화를 굳이 들지 않더라도, 소아의 치료에 있어 ‘따뜻함’을 지키는 것은 아이들의 생존에 필수적인 일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아이들은 외부의 감염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약간의 열을 일부러 올리는 경우도 있으니, 만일 ‘온기의 신’이 있다면 그는 아이들을 지키는 모습으로 형상화되어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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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온 유지 장치 '베어 허거'. 전원을 켜면 따뜻한 바람이 호스를 통해 불어져 나온다. /이주영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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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아응급실 한구석에 늘 있지만, 때로 재미있는 방식으로 사용되는 물건도 있습니다. 생리식염수가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중심 체온까지 많이 낮은 정도는 아니지만 손발이 유난히 차가워 힘들어하거나, 국소적인 혈류를 더 좋게 만들 필요가 있을 때 우리는 비닐로 포장된 생리식염수를 따뜻하게 데워 사용합니다. 핫팩이 있기는 하지만, 어떤 모양, 어떤 크기로도 만들 수 있는 생리식염수가 종종 훨씬 더 편리하거든요. 큰 비닐백째 몸 전체에 대어주기에도, 작은 주머니 여러 개로 나누어 몸 구석구석에 끼워주기에도, 비닐장갑 안에 넣어 조물조물 만지며 놀게 하기에도 안성맞춤이지요. 그렇게 아이의 몸이 따뜻해지면, 거짓말처럼 혈색도 살아납니다.

이건 비밀인데, 생리식염수는 저도 사용하곤 합니다. 난방을 해도 문을 열고 오가는 사람들과 잦은 환기로 스산한 새벽이 있지요. “아휴, 오늘 밤은 유난히 춥네요!” 응급실을 한 바퀴 돌며 아이들을 보다 간호사실을 지나며 한마디 툭 던지면 몇 분 뒤 다정한 얼굴의 간호사가 1000mL의 생리식염수 비닐백 하나를 데워 어린아이 안듯 꼭 안고 들어와 저에게 건네줍니다. “교수님, 웜 셀라인(warm saline·따뜻한 생리식염수) 하나 드려요?” 배시시 웃는 그녀들의 얼굴과 눈빛에 따스함이 가득합니다. 그리고 그 따스함은 몰캉한 생리식염수 주머니를 통해 제 품으로 들어옵니다. 그러면 시리던 새벽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포근하고 편안해지곤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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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mL 생리식염수 /이주영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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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쁘고 어수선할 것만 같은 응급실이지만, 오직 따뜻함만으로 많은 것이 회복되는 마법 같은 장면을 우리는 종종 봅니다. 바라건대 그건 응급실에서만, 아이들에게만 일어나는 일은 아닐 거예요. 찬 바람이 부는 퇴근길 종종걸음으로 돌아와 현관문을 열었을 때 집 안의 훈훈한 공기가 내 몸을 감싸는 아늑한 순간, 지쳐 있는 어깨를 두드리며 동료가 건넨 커피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온기, 오랜만에 걸려온 옛 친구의 전화 목소리에 문득 떠오른 어린 시절 기억의 조각들이 모두 우리를 살리는 오늘의 따뜻함입니다.

다가오는 새봄, 당신의 어깨에 따뜻함이 내려앉기를, 그리고 당신의 손끝으로 그 따스함이 다시 누군가의 어깨 위로 전해지기를. 진짜 시작은 봄에 하는 거니까, 새해의 작심삼일은 잊고 새 마음과 새 힘에 따뜻함을 한 움큼 얹어 가족을 맞이하고, 동료에게 손을 내밀고, 친구에게 목소리를 들려주세요. 우리는 올해 참 좋을 겁니다.

[이주영 순천향대 천안병원 소아전문응급센터 임상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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