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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3 (화)

[지금, 여기] 소란스럽게, 차별을 없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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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20일은 트랜스젠더 추모의 날이었다. 1998년 미국 보스턴에서 살해당한 아프리카계 트랜스젠더 여성 리타 헤스터를 기리며 시작된 국제적 기념일인 이날을 맞아 한국에서도 다양한 행사들이 개최된다. 올해는 용산 이태원 광장에서 행진이 진행되었다.

2020년에는 추모의 날을 맞아 한 유튜브 채널에서 만든 영상 촬영에 함께한 적이 있다. 트랜스젠더의 삶, 건강, 죽음 등을 주제로 5명의 당사자들이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였다. 그때 공통적으로 이야기한 것 중에 하나가 트랜스젠더들이 병원에 잘 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나 역시 그러하다. 평소에 웬만큼 아프지 않으면 병원에 잘 안 가는 기질도 있지만, 그에 못지않은 이유는 내원 시 법적 성별로 인해 혹시 생길지 모르는 불편한 상황 때문이다. 이전에 트랜스젠더 여성인 한 친구를 따라 안과에 간 적이 있다. 주민번호를 적고 접수를 하는 순간 직원 분이 큰 소리로 “그런데 남성이세요?”라고 이야기했던 일이 지금도 기억에 떠오르곤 한다.

2014년 국가인권위원회의 트랜스젠더 혐오차별실태조사에서 응답자 554명 중 119명(21.5%)이 ‘부당한 대우를 받을까봐 병원 이용을 포기했다’고 응답한 사실은 이것이 나 개인만의 경험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리고 설령 불편함을 감수하고 병원을 이용하더라도 차별은 이어진다. 같은 조사에서 의료기관을 이용한 사람 526명 중 174명(33.1%)이 차별 경험으로 ‘성별정체성에 맞지 않는 입원실이나 탈의실 등을 이용한 것’이라고 답하였다. 발을 들여놓는 것부터가 꺼려지고 설령 들어가도 또 다른 차별을 마주해야 하는 곳. 병원은 그렇게 성별정체성을 경계로 문턱을 높이고 있다.

그럼에도 최근 보건복지부는 지난 1월 국가인권위원회가 낸 ‘트랜스젠더를 위한 의료서비스 이용 가이드라인을 만들라’는 권고에 대해 불수용 의사를 밝혔다. 성소수자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정부기관이 전가의 보도처럼 써먹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이유에서였다. 누구나 아파도 차별없이 병원을 이용하도록 고민하고 가이드라인을 만드는 것이 사회적 합의라는 모호한 핑계로 미룰 수 있는 일인가.

정부가 그렇게 미적대는 사이 차별은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얼마 전에는 법원의 결정을 통해 법적 성별정정을 완료했음에도 주민등록변경 요구를 거부하고 계약 해지를 원하던 보험사가,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조사를 하자 변경 요구를 받아들였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해결이 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애초에 이런 일로 차별 진정을 하고 조사에 들어가야 하는 상황 자체가 이상한 일이다. 신체 침습적인 외과적 수술을 요구하는 법원 앞에서 어렵게 성별정정을 하고도, 또다시 보험사의 변경 허가를 기다려야 하는 지금의 현실은 대체 무엇인가. 복지부는 이것도 사회적 합의가 없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답할 것인가.

지금 우리 사회가 머물러 있는 사이 세계는 변하고 있다. 지난 10월25일 일본 최고재판소는 만장일치로 법적 성별을 변경할 때 생식능력을 없앨 것을 요구하는 법률 조항에 대해 위헌 판결을 내렸다. 판결문에서 구사노 고이치 재판관은 외부성기 수술을 요구하는 것 역시 위헌이라며 다음과 같은 취지의 말을 하였다.

“성별변경에 외부성기 수술을 요구하지 않는 사회가 이를 요구하는 사회에 비해 조금 더 소란스러운 사회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소란스러움은 국민 쌍방의 자유와 이익을 충분히 존중하는 것을 전제로 국민이 누려야 하는 복리를 최대화하기 위한 노력과 그 성과라고 받아들일 수 있다.”

2024년에도 트랜스젠더 추모의 날이 올 것이다. 부디 그때는 한국 사회도 보다 더 소란스러워져 있기를, 그리하여 누구나 성별과 성별정체성에 차별 없이 병원을 가고 보험을 가입하고 은행을 이용하며 투표할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

경향신문

박한희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변호사


박한희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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