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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퓰리처상 수상 사회학자가 파헤친 가장 부유한 나라 미국에 존재하는 '빈곤'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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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사회학자 매슈 데즈먼드 '미국이 만든 가난'
한국일보

마약성 진통제 펜타닐 오남용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떠오른 미국 필라델피아의 거리에서 뇌가 손상된 펜타닐 중독자들이 마치 좀비처럼 구부정한 자세로 걷고 있다. 유튜브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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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참 이상한 나라다. 전 세계가 고물가·저성장으로 신음하고 있는데 지난 3분기 4.9% 성장하며 나 홀로 풍요를 누린다. 하나 속살을 들여다보면 이해되지 않는 장면투성이다. 필라델피아의 거리에서는 마약중독자들이 좀비처럼 걸어 다니고, 샌프란시스코는 스타벅스 같은 대형 커피 프랜차이즈도 철수할 정도로 위험한 '범죄도시'가 돼버렸다. 거대 정보기술(IT) 기업 직원도 높은 주거비에 차량을 집으로 삼고, 도시 외곽엔 거대한 텐트촌이 펼쳐진 이 나라를 진정으로 부유한 국가라 할 수 있을까.

전작 '쫓겨난 사람들'에서 미국의 가난한 도시 밀워키의 쫓겨나는 이들의 삶을 추적한 사회학자 매슈 데즈먼드 프린스턴대 교수가 이번엔 '빈곤 탐사 렌즈'를 미 전역을 향해 들이댔다. 전작으로 퓰리처상,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 등을 받은 그의 신간 '미국이 만든 가난'은 출간과 동시에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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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빈곤 문제, 도시빈민가의 주거 문제, 인종 불평등 문제 등을 연구하는 매슈 데즈먼드는 '폴리티코'가 선정한 '미국 정치 토론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50인'에 올랐으며, 전작 '쫓겨난 사람들'은 빌 게이츠의 추천을 비롯해 20여 개 주력 매체에서 2016년 최고의 책으로 극찬받았다. 아르테 제공(ⓒ The Guard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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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빈곤의 근원으로 지적되는 것이 사회적 취약계층을 위한 예산 삭감, 혹은 이윤만을 고려하는 기업의 착취적 행태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다. 하지만 연방정부 예산을 살폈을 때 적어도 '빈민에 대한 지원'만큼은 늘었다. 이 괴리는 무엇 때문일까.

"가난한 사람들에게 배정된 정부 원조의 상당량이 이들에게 전혀 닿지도 않는다." 저자는 미국의 사회복지가 새는 바가지임에 주목한다. 2020년 빈곤가정 일시부조로 배정된 1달러 가운데 가난한 가정이 직접 받은 돈은 22센트에 불과했다. 미시시피 극빈층 가정에 지원하기로 배정된 복지부 재정은 교회 콘서트에 가수를 고용하고, 지역 비영리조직 대표가 외제차를 모는 데 사용됐다. 당국이 장애 신청 절차를 어렵게 만든 탓에 매년 10억 달러가 넘는 사회보장기금이 장애 수당이 아닌, 장애 수당을 받기 위해 고용된 변호사에게 지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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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미국이 만든 가난'은 방대한 실증연구를 기반으로 쓰였지만 대중이 읽기에 조금도 어렵지 않다. 그는 '우리는 자신의 육체와 영혼으로 위대한 문제를 경험하기를 욕망해야 한다'는 니체의 말을 인용하며 빈부의 공간적 분리 해체를 주장한다. 빈부의 분리는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오염시킨다. 부유한 사람들이 똑같이 부유한 이웃들 옆에서 생활하고 일하고 놀고 신앙생활을 할 때, 말 그대로 가난한 사람들을 망각하고 점점 편협해질 수 있다. 아르테 제공(ⓒ Baron Bix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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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미국의 빈곤이 지속되는 원인을 노동·주택·금융 분야에서 이뤄지는 '착취'로 설명하며 풍성한 데이터로 논증한다. ①노동자를 싸게 부려 먹는 '노동착취'가 일상이 됐다. 노조 쇠퇴로 노동자의 힘이 약해지면서 질 낮은 저임금 일자리가 크게 늘었다. ②가난한 사람들은 다 낡아빠진 집에 살면서도 소득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임대료를 감당할 수밖에 없다. 그 돈이면 주택담보대출 원리금을 감당할 수 있지만, 은행은 가난한 흑인 동네를 대출 불가 지역으로 지정해 영업조차 하지 않는다. ③금융 착취도 일상적이다. 잔고보다 많은 금액을 사용하거나 인출할 때 내는 초과 인출 수수료의 84%를 평균잔고가 350달러 이하인 빈자가 냈다. 은행은 116억8,00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수표를 현금화하는 데에도 1~10%를 수수료로 떼지만, 돈을 지불하려면 별도리가 없다.

"빈곤은 단순히 충분한 돈이 없는 상태만이 아니다. 충분한 선택지가 없고, 그 때문에 이용당하는 상태다." 미 전역에서 이뤄지는 일상적 착취를 두루 살핀 저자의 결론이다. 그리고 빈자를 탓할 것이 아니라 질문을 이같이 전환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착취는) 누구에게 이익인가? 누구의 배를 불리는가?"

놀랍게도 빈곤으로 풍요로워지는 사람은 다름 아닌 평범한 제도의 보호를 받는 '우리'다. 복지 프로그램은 더 이상 가장 약하고 보호받아야 하는 사람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예컨대 2020년 미 연방정부는 주택 소유자 보조금으로 1,930억 달러 이상을 썼다. 이는 저소득 가구의 주택보조금에 들어간 금액 530억 달러보다 훨씬 많다. 저소득층 주거 지원보다 영끌 투자족의 붕괴를 막기 위해 '특례보금자리론'에 39조 원을 푼 한국도 남 말할 처지가 아니다. 이렇게 혜택을 받아 주택을 구입한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과 통합되지 않기 위해 철옹성 같은 벽을 두른다. '학군'과 '주거지' '교통 노선' 등을 독점한 우리가 풍요로워지는 사이, 담장 밖에 있는 사람들은 처절한 삶을 버틴다.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 절망이 집중된 동네를 향해 '더럽고, 게으르고, 가망 없다'고 쉽게 낙인찍는다.

"우리가 이렇게 잘사는 데도 불구하고 이 땅에 그 많은 가난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잘살기 때문에 바로 가난이 사라지지 못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들이 아니다. 우리다."

그의 일갈이 매섭고 적확하다. 개인으로 하여금 무능한 정부나 탐욕적인 기업 탓을 하며 빠져나가지 못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뭘까. 바로 담대하게 가난과 섞이는 것이다. 담장 너머로 돈을 던지는 대신 그 담장을 허물어뜨리는 것이다. 부동산 가치를 하락시키지 않고도, 학교의 질을 희생시키지 않고도, 부유한 아이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도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이 어울려 사는 지역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그리하여 희망과 기회가 이곳저곳에 흐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책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끝난다. "빈곤을 없애려면 아주 똑똑해야 할 필요도 없다. 빈곤을 충분히 싫어하는 마음만 있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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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만든 가난·매슈 데즈먼드 지음·성원 옮김·아르테 발행·416쪽·3만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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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미 기자 herstor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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