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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2 (일)

'갬성' 카페로 변신한 '100년 목욕탕'… '가자미 마을'로 오는 청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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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소·극·장: #14 경북 경주 감포읍]
폐업 목욕탕서 '청년마을' 아이디어 구상
정부 지원받아 여행·특산물로 영역 확장
바리스타 청년 서울 대신 고향 근처 감포
"지역 주민 협조 덕, 청년 살 곳 마련부터

편집자주

지역 소멸위기 극복 장면, '지역 소극장.' 기발한 아이디어와 정책으로 소멸 위기를 넘고 있는 우리 지역 이야기를 4주에 한 번씩 토요일 상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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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회사 ㈜마카모디 직원들이 지난 2021년 6월 경북 경주시 감포읍 주민들과 일대 적산가옥을 둘러보고 있다. ㈜마카모디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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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주시 감포읍은 경주에서 가장 동쪽 끝자락에 있는 어촌마을이다. 경주시는 ‘수학여행 1번지’ 답게 관광객들로 연중 붐비지만, 불국사에서 차를 타고 동쪽 바다를 향해 차로 25분을 달려야 하는 감포는 늘 한적하다. 인구수도 많지 않다. 올해 3월 말 기준 주민등록 주민 수는 5,221명으로 경주시 전체 인구(24만6,371명)의 2%에 불과하고 경주 시내 23개 읍∙면∙동 가운데 8번째로 인구가 적은 소멸위기 지역이다. 감포 지역 초등학교 3곳은 감포초등학교 한 곳으로 통폐합됐는데 이마저도 한 학년에 10명 남짓한 소규모 인원으로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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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주시 감포읍 전경. 경주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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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인구 및 청년(19~39세) 인구 추이(명). 그래픽=박구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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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바람 앞 등불’ 같기만 하던 감포가 최근 청년들로 북적이고 있다. 이들은 과거 감포에 살던 일본인들의 적산가옥을 고쳐 이색 카페를 운영하고 싱싱한 지역 수산물로 다양한 요리법을 개발해 알리고 있다. 또 어촌마을의 유유자적한 삶을 즐기면서 감포를 ‘제2의 고향’으로 삼고 소중히 여기며 가꿔 나가고 있다.

풍요로웠던 1925년으로


감포에 청년들을 불러 모은 사람은 경주 출신의 김미나(38)씨다. 디자인 회사인 ‘마카모디’를 운영하는 김미나 공동대표는 제품 홍보영상 촬영차 감포항을 찾았다가 눈앞에 펼쳐진 풍광에 매료됐다. 김 대표는 “경주 토박이인데도 감포가 도심에서 한참 떨어진 마을이라 찾을 기회가 별로 없었다”며 “언덕에서 내려다보이는 포구의 풍경이 아름다워 ‘경주에 이렇게 멋진 바다가 있었나’ 절로 감탄이 나왔다”고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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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주시 감포읍 감포항에 있는 송대말 등대와 항구 전경. 경주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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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항구 뒷골목을 거닐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적산가옥을 보고 또 한 번 놀랐다. 일제강점기 시절에 감포 앞바다의 풍부한 어자원을 노린 일본인들이 살던 집이었다. 일부는 현대식으로 고쳤지만 빈집도 많아 뒷골목 전체가 우범지대로 전락한 상태였다.

감포에 반한 뒤로 자주 왕래하게 된 김 대표는 적산가옥 거리 후미진 곳에 100년 된 목욕탕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미 30년째 폐업 상태였지만, 성업 당시에는 마을 해녀들과 해남들이 물질을 하다 저체온증이 왔을 때 응급실로 쓰이기도 했다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

김 대표는 자신과 회사를 공동 운영하고 있는 이미나(42) 공동대표 그리고 주민들과 상의해 이 목욕탕을 카페로 변신시켰다. 이름은 1925년도의 숫자와 지명을 합쳐 ‘1925 감포’로 지었다. 지금으로부터 꼭 99년 전, 감포는 인구가 2만 명이 넘고 국가어항으로 정식 개항했을 정도로 풍요로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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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역사를 간직한 경북 경주시 감포읍 목욕탕을 지난 2021년 10월 카페로 바꾸기 위해 수리하는 모습. ㈜마카모디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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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미 요리에서 시작해 '굿즈'까지


카페 1925 감포는 대박을 쳤다. 100년간 유물처럼 남은 목욕탕의 흔적이 눈길을 끈 데다 청년 감성에 맞게 손을 잘 본 덕분이었다. 카페는 감포 중심가도 아닌 뒷골목 구석에 있지만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타고 이색 카페로 금세 소문났다. 지금도 주말이면 발 디딜 틈 없이 북적거린다.

1925 감포가 성공하자 반신반의했던 주변 시선도 달라졌다. 마카모디 임직원들은 이 기회에 마을 전체를 변신시키기로 마음먹었다. 때마침 정부가 ‘청년마을 만들기 지원사업’ 을 공모. 행정안전부가 해마다 인구감소지역 중 12곳을 골라 청년들이 지역에서 머물 수 있도록 돕는 사업으로, 3년간 최대 6억 원을 지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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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주시 감포읍 골목길인 해국길 계단 위에서 내려다본 마을 모습. 청년마을인 가자미 마을이 생기면서 해마다 주민들과 청년들을 위한 음악회 등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 경주=김정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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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주시 가자미 마을 청년들이 지난 2022년 9월 경주시 감포읍 해국길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마카모디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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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말, 마카모디는 ‘가자미 마을’이라는 이름으로 신청서류를 냈고 심사를 통과했다. 가자미는 이곳에서 가장 많이 잡히는 생선이다. 김 대표와 이 대표는 이듬해 작은 가게를 빌려 식당으로 꾸미고 청년들이 배를 타고 감포항 앞바다로 나가 가자미를 잡고 요리해 판매할 수 있도록 기획했다. 1개월짜리 프로그램에 총 67명이 참여했고, 1박 2일이나 3박 4일로 진행되는 도킹캠프는 1,636명이나 체험했다. 지난해부터는 여행으로 사업 영역을 넓혔다. 최소 10일에서 최대 9주짜리 여행 상품을 만들었고 500명 넘는 청년들이 참여해 마을 구석구석을 누볐다. 올해는 특산물 등 다양한 지역 자원을 소재로 한 상품까지 제작해 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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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주시 가자미 마을 청년들이 지난 2022년 7월 경주시 감포읍 송대말등대 앞 잔디밭에서 마을 주민들과 가자미로 만든 요리로 파티를 열고 있다. ㈜마카모디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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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토박이 청년 마음도 붙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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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된 목욕탕에서 카페로 바뀐 경북 경주시 감포읍 1925 감포 입구. 경주=김정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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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미 마을이 전국 청년들에게 인기를 끌면서, 본래 경주에서 살고 있던 청년들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경주에서 나고 자란 김은옥(39)씨와 이채영(24)씨는 서울 유명 카페에서 일할 기회가 있었는데도 카페 1925에서 바리스타 모집 공고가 뜨자 곧장 입사 지원서를 냈다. 김은옥씨는 “내가 사는 곳에 전국 어디에 내놔도 손색없는 멋진 카페가 있고, 그 수준에 맞는 커피를 만들어 내겠다는 자부심에 과감히 서울행을 포기했다”고 말했다. 이어 “고향을 떠나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어 행복하다”고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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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주시 감포읍 가자미 마을을 찾은 청년들이 지난해 10월 바닷가에서 산책하며 쓰레기를 줍는 플로깅 행사 후 감포항 앞바다를 감상하고 있다. ㈜마카모디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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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표는 가자미 마을이 성공적으로 안착한 비결 중 하나로 지역 주민의 적극적인 협조를 꼽았다. 이 대표는 “여러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때마다 지역 주민들이 강사나 가이드로 적극 나서줬다”며 “지역살이로 10여 명의 청년들이 창업하거나 취직해 정착하는 성과도 냈다”고 뿌듯해했다. 그러나 청년 정착 사업의 확장과 지속성을 위한 과제를 말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무엇보다 청년들이 실질적으로 살 수 있는 곳이 별로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다. 김 대표는 “목욕탕을 카페로 바꾸고 다른 적산가옥을 고쳐보려고 했지만 무허가 건물이거나 임대료나 수리비가 턱없이 비싸 엄두조차 내질 못했다”며 “제2, 제3의 가자미 마을이 나오려면 지자체와 지역 주민들이 이런 부분부터 해결할 준비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경주= 김정혜 기자 kj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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