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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 경성]조선의 첫 스포츠스타 엄복동의 인생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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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라이브러리속 모던 경성]1913년 日 선수와 겨뤄 우승하며 국민영웅 떠올라…6.25 때 폭격으로 숨져

조선일보

1923년 마산체육회가 주최한 자전거대회에서 우승한 엄복동. '동양자전거왕'이란 별명을 얻었다.


1920년 5월2일 경복궁에서 열린 경성시민대운동회는 후반 아수라장이 됐다. 경성상공연합회가 주최한 운동회에선 6마일 마라톤을 비롯, 15개 종목이 열렸다. 이날 하이라이트 중 하나인 자전거 경주대회 결승전이 발단이 됐다. 엄복동을 비롯한 조선인 선수 셋과 일본 선수 모리시타(森下正一) 등 넷이 출전했다. 경기장을 40바퀴 도는 코스였다. 엄복동은 중반까지 뒤에서 달리다 서른 바퀴쯤부터 속도를 내면서 선두에 나섰다. 흥분한 관중들은 함성을 내지르며 엄복동을 응원했다. 갑자기 모리시타가 거꾸로 넘어지며 얼굴에 큰 부상을 입었다. 일본인 심판은 경기를 중단시키려고 경기장에 뛰어들었지만 엄복동은 계속 달렸다.

‘소위 심판부에 있다는 일본 사람들은 우승기가 그만 갈데없는 엄복동의 것이 되는 것을 크게 분하게 여겨 엄 군을 돌지 못하게 막아내었다. 그러나 엄군은 조금도 굴치않고 여전히 돌아 39회에까지 이른 것을 여러 일본 사람이 기어코 길을 막고 돌지 못하게 하매 심판계앞에 세웠던 우승기를 그만 엄복동군에게 내어주었다.’ 매일신보는 일본 심판들이 경기를 중단시켰으나 하는 수없이 우승기를 엄복동에게 전달했다고 보도했다.(‘悲風慘雨의 수라장이 된 경주대회’, 매일신보 1920년5월4일)

그런데 일부 일본인 관객들이 엄복동의 우승기를 빼앗고 그를 두들겨패면서 사달이 났다. ‘심판과 일본 사람은 때려잡아라!’ 관객들은 돌팔매질을 했고, 순식간에 경기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경찰이 개입하고서야 겨우 진정됐다.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조차 ‘不可解의 일본 사람’이라며 일본인 심판과 관객의 편파조치를 항의할 정도였다. 매일신보는 다음날에도 ‘호소무처(呼訴無處)의 차한(此恨)을?’기사에서 ‘조선사람은 우승기도 가질 자격이 없는가’라며 따지는 기사를 내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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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엄복동 자전거. 1910년대 만든 영국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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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 전조선자전거 대회 1위로 혜성처럼 등장

자전거 경주는 1910년대~1920년대 최고 인기를 누린 스포츠였다. ‘운동중에는 아마 장쾌하고 볼만한 것은 자전거경주밖에 다시 없을 듯하다’(매일신보 1922년5월23일)는 얘기까지 나올 정도였다.

엄복동이 일본인들이 우세한 자전거 경주에 혜성처럼 등장한 것은 1913년 4월13일 용산 연병장에서 열린 전(全)조선자전거 대회였다. 조선 선수 2명과 일본 선수 4명이 겨룬 제일류 경기에서 엄복동은 1위, 황수복이 3위를 했다. 하지만 우승기를 놓고 겨룬 9명(조선인은 엄복동)이 출전한 최종 경기에서 결승점 직전 일본인 선수와 부딪혀 도중탈락했다. 매일신보에 따르면, 이날 경기를 보러 온 관객이 10만명을 넘어 용산까지 임시전차 수십량을 특별운행했다. 인력거와 도보로 용산까지 가는 인파가 가득할 정도로 성황을 이뤘다. 엄복동은 4월27일 평양에서 열린 자전거대회에서도 3만5000명 관객이 몰려든 가운데 20바퀴를 도는 ‘조선 일류선수 책임경주’에서 1등을 차지했다. 엄복동은 근대 스포츠가 이 땅에 들어온 이래 대중의 사랑을 받은 최초의 스포츠스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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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5월 장충단에서 열린 자전거경주대회에서 일본 선수들을 물리치고 우승한 엄복동. 조선일보 1923년 5월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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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덩이 몇 번 꿈적거리며…” 역전의 명수

엄복동은 1922년 5월21일 경성윤업회(輪業會)가 장충단에서 주최한 전(全)조선자전거경주대회에서도 우승했다. 오사카 등에서 온 일본인 선수 4명과 조선인 선수 7명이 참가한 이 경주에서 엄복동은 막판 스퍼트 전술을 구사했다. 40바퀴를 도는 이 경기에서 내내 뒤처져있다가 35바퀴쯤 돌았을 때부터 ‘엉덩이 몇번 꿈적거리는 바람에 앞선 내지인(일본인)을 멀리 뒤에 떨어뜨’리면서 선두로 치고 나갔다.

이듬해 5월5일 경성윤업유지회(輪業有志會)가 장충단공원에서 주최한 자전거경주대회는 분위기가 더욱 고조됐다. 연전연승하는 엄복동에게 일본에서 제일가는 자전거 선수들이 도전장을 내밀었기 때문이다.

‘조선에서 자전거 경주를 할 것같으면 의례히 엄복동군이 1등을 하게 되는 고로 작년과 재작년에 일본에서도 몇째 안가는 자전거 선수 몇 사람이 일부러 나와서 참가를 하였으나 마침내 1등은 얻지 못하고 돌아갔었는데 금년에는 일본에서도 제일 유명한 선수 10여명이 며칠전부터 경성에 들어와서 연습을 하며 자웅을 결단코자 하는 중이므로….’(’자전거계의 비장(飛將), 노당익장(老當益壯)의 엄복동군’, 조선일보 1923년5월7일)

엄복동은 경기 중반까지는 뒤처져서 기회를 노리다가 막판 역주로 선두로 치고 나오는 전술을 선호했다. 20바퀴를 도는 이 경기에서 7,8바퀴까지는 뒤에서 슬슬 관망만 했다. 열바퀴가 넘으면서 치고 나오는 듯하다 다시 뒤로 물러났다. 마지막 두세바퀴를 남기고 다시 선두를 노리더니 19바퀴째엔 다른 선수보다 7,8보를 앞서가며 결승점을 통과했다. 역전의 귀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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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개봉한 영화 '자전차왕 엄복동'. 가수 비를 주인공으로 내세웠으나 설득력 떨어지는 드라마와 상투적인 반일 코드로 관객들의 외면을 받아 흥행에서 참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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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장물 거래’로 1년6개월 징역형

엄복동은 1924년 10월3,4일 장충단공원서 열린 전조선자전거경기대회를 마지막으로 은퇴한다고 밝혔다. 매일신보 1924년10월4일자는 ‘이번을 마지막으로 하고 영원히 경주회에 출장치않기로 결심하였다는 바, 군은 자기의 평생의 기능을 다하여 최후의 경기를 될 수 있는 대로 화려하게 할이라더라’고 보도했다.서른 두살 노장(老將)이니 그럴 만했다. 엄복동은 4일 16바퀴를 도는 제9회 경기에서 1위를 차지하면서 예고한 대로 은퇴경기를 화려하게 마감했다.

1년 반 뒤 엄복동이 느닷없이 경찰에 체포됐다는 기사가 실렸다.(‘엄복동 피착’,조선일보 1926년 6월23일) 장물거래 혐의였다. 1926년6월20일 오후 장충단공원에서 열린 자전거대회 종료 직후, 본정서(本町署) 경찰이 엄복동을 연행했다. 은퇴를 선언했던 엄복동은 서울윤업회(輪業會)가 주최하고, 시대일보가 후원한 제2회 전조선자전거경주대회에 참가해 8바퀴를 도는 2마일 경기에서 1등을 차지했다.(시대일보 1926년6월22일) 엄복동은 경성시내에서 도난당한 자전거 20여대를 원산에 팔아넘긴 혐의를 받았다.

원산으로 이송된 엄복동은 함흥에서 열린 1심재판에서 징역 18개월과 벌금 60원을 선고받았다. 동아일보(1926년10월7일자)에 따르면, 엄복동은 병목정(並木町, 서울 중구 쌍림동)229번지에서 자전거상점을 운영하던 중, 절도전과범 이효진이 훔친 자전거 10여대를 원산으로 가져가 팔았다. 함흥지방법원은 9월20일 이효진은 징역 4년, 엄복동은 징역 1년6개월에 벌금 50원 판결을 내렸는데, 두 사람은 항소해서 경성 복심법원 재판을 앞두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전국 각지에서 경주에 참가해달라며 선금이 답지하던 스타가 왜 이런 거래를 했는지,내막은 알 수없다. 엄복동은 항소심에서 뒤엎을 가능성이 적다고 생각했는지, 이내 항소를 포기하고 원심대로 징역을 선택했다는 보도가 뒤이어 나왔다.(‘地上鳥人 服役’, 매일신보 1926년 11월7일)

◇48세 엄복동 5000미터 1위

징역형을 살고 나온 엄복동은 1928년 6월23일 평양 기림리공설운동장에서 평양조선인윤업조합 주최로 열린 전조선남녀자전거경기대회에 모습을 나타냈다.(‘인기집중리에 묘기의 예선전’, 동아일보 1928년6월25일) 기림리 공설운동장은 1926년 평양부(府) 공설운동장으로 건립됐는데, 해방 후 한 때 모란봉경기장으로 불렸다가 현재 김일성경기장으로 알려진 곳이다. 엄복동은 20바퀴를 도는 1류 경기에서 1위를 차지했다.

엄복동은 1935년4월28일~29일 조선일보 경남(京南,경성 남부)지국 주최로 경성운동장에서 열린 전조선남녀자전거경기대회에 모습을 나타냈다. ‘10여년간 그의 존재를 모르던 엄복동’(‘참가선수 150, 박두한 자전거경기대회’,조선일보 1935년4월26일)이란 표현까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오랜만의 공식무대였던 듯하다. 엄복동의 실력은 녹슬지 않았다. 번외 1500미터 일반 결승에서 1등을 차지했다.(‘飛燕같은 快速에 2만 관중은 陶然’, 조선일보 1935년5월1일)

40대에 접어든 엄복동은 주로 번외경기에 출전했지만 ‘흥행보증수표’였다. 왕년의 스타를 보려는 관객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엄복동은 1935년 5월28일 함흥에서 열린 전조선남녀자전거경기대회에도 참가했다. ‘이날은 은혜받은 쾌청한 날씨로 관중들은 무려 수만명을 돌파하였고 중에도 12년간이나 종적을 감췄던 자전거계의 상승장군 엄복동(45)군의 출전으로 이 대회는 공전의 성황을 이루었는바’(‘함흥자전거경기 성황으로 종막’, 동아일보 1935년5월31일)라는 기사로 알 수있듯, 그가 출전한다는 소식만 들려도 관객들은 인산인해를 이뤘다. 엄복동은 한달 뒤인 7월8일~9일 정주상무회주최로 정주에서 열린 자전거대회 노장분야에서 1등을 차지했다. 이듬해인 1936년5월30일~31일 황해도 재령에서 열린 자전거경기에도 참가, ‘번외’경기에서 1등을 차지했다.

1939년 5월28일 오전 9시반 인천 도산정 공설운동장에서 전(全)조선자전거 경기대회가 열렸다. 인천 자전거선수회가 주최한 전국대회였다. 참가선수만 200여 명이었는데, 관중 8000여명이 몰려들었다.엄복동은 이날 5000미터에서 1위를 했다.(‘공전의 성황속에 자전거 경기 종막’, 조선일보 1939년5월30일)

◇오리무중인 엄복동의 행적

엄복동의 생애는 출생지부터 은퇴 이후의 행적, 6.25 전쟁 중의 돌연한 죽음 등 여전히 불확실한 대목이 많다. 1892년생으로 알려져있으나 출생지는 서울 관철동, 오장동, 평택으로 제각각이다. 사망일도 6.25때 폭격으로 죽었다는 얘기만 전해질 뿐이다. 1920년대 후반 이후 간간히 전국에서 열리는 자전거경주에 참가했으나 그의 행적은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 없다.

엄복동은 해방 후에도 종종 경기에 출전했다. 1949년 6월5일 군산에서 열린 자전거기록경기대회에서 번외경기로 열린 2000미터 경주에서 엄복동이 1위를 했다. 환갑을 코앞에 둔 엄복동이 번외경기이긴 하지만 1등을 차지한 것이다. 엄복동은 다음달인 7월23일~24일 대한자전거경기연맹 주최로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대회에도 노장3000미터 속도경기에서 1등을 했다.

◇등록문화재된 엄복동 자전거

‘경기도 양주군 최천면 덕계리에 거주하는 왕년의 자전거 선수 엄복동씨는 생활난에 빠져 그랬는지 지난 (3월)22일 시내 청진동 박연이씨 문전에 있는 자전거를 훔치다가 경관에게 체포되었는데 이를 담당한 안희경 검사는 훈시 정도로 보냈다 한다.’(‘왕년의 자전거 선수, 자전거 훔치다 피검’, 조선일보 1950년4월1일)

엄복동의 이름이 다시 신문에 오르내린 건 1950년 4월이었다. 생활고 때문인지 남의 집앞 자전거를 훔치다 체포됐다는 뉴스였다. 검사도 딱했던지 훈방으로 끝냈다. 하지만 곧 이어 터진 6.25 전쟁으로 엄복동은 세상을 떴다. 수많은 사람이 죽어간 전쟁중의 혼란 때문인지 당시 신문에서 엄복동의 부고를 찾을 길 없다. 훗날 엄복동의 자취를 추적한 기사는 그의 최후를 이렇게 증언했다. ‘1950년 6.25때 자전거를 타고 고향 평택을 찾아가다가 관악산 기슭 남태령에서 적탄에 맞아 쓸쓸히 갔다’(‘엄선수 인기 대단, 일본대회 모두 보이콧’, 조선일보 1972년 5월12일)

엄복동이 1910년대 선수시절부터 타던 자전거는 2010년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영국 러지 위트워스(Rudge-Whitworth)에서 만든 자전거로 1910년대 제작됐는데, 엄복동이 후배선수에게 넘겼다고 한다.

◇참고자료

하웅용, 이용우, ‘엄복동 자전거의 문화·기술사적 해석’, 한국체육사학회지 제17권제1호, 2012

임석원, 박성수, 김대한, ‘일제강점기 ‘륜패천하’(輪覇天下)의 주역 엄복동 생애의 明과 暗에 관한 소고, 한국체육학회지 제53권제3호, 2014

이준호, 신승환, 유도상, ‘자전거영웅 엄복동의 체육활동과 그의 활동이 대한제국민들의 독립의식 고취에 미친 영향, 한국체육과학회지 제25권제6호,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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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철 학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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