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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3 (월)

위로받을 곳 하나 없는 세상… 詩라는 등불을 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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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문예대상 천양희 시인

“어두운 길을 멀리 비추는 등대 불빛이 만해 시인의 정신이라고 생각해요. 그 정신을 기억하며 살아왔지만, 이제는 절대 놓치지 않으려 합니다.”

조선일보

천양희 시인은 “만해 시인의 시를 읽으며 수없이 감탄했다. 시 ‘님의 침묵’에서 ‘님’에 대한 해석 중 ‘가치 있는 모든 존재’라는 것이 가장 마음에 든다”며 “시는 사치가 아닌 가치라고 생각한다. 세상과 사람에 대한 진실을 말하기 위해 시를 쓴다”고 했다. /남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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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만해문예대상 수상자 천양희(81) 시인은 수상 소식을 듣자 ‘등대’가 떠올랐다고 한다. 몇 년 전, 어두운 길을 뚫고 봤던 등대다. “길이 보이지 않아 두려웠습니다. 그래도 등대는 우뚝 서서 뱃길을 멀리 비추고 있었어요. 그 등대가 시 ‘알 수 없어요’에서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라고 했던 만해 시인의 푸른 정신이 아닐까 싶어요.” 시인은 이번 수상이 “혼란한 이 시대에 시인의 역할이 무엇인가 묻는 것 같다”라며 “물질에는 눈이 밝으면서 정신을 잃고 있는 요즘, 만해 시인처럼 어둠을 밝혀주는 등불을 켜고 싶다”라고 했다.

천양희는 1965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한 이래 전업 시인의 삶을 고수해 왔다. “생활이 궁핍할 수밖에 없다”면서도 “이 시대가 정신적으로 궁핍한데, 물질의 만족 때문에 정신의 풍성함을 느끼지 못하게 될 수 있다”는 이유. 이화여대 국문과에 다니며 이른 나이에 등단했지만, 첫 시집 ‘신이 우리에게 묻는다면’을 내기까지 18년이 걸렸다. 폐결핵과 가족 문제를 비롯한 육신의 고통이 그를 세상과 시에서 멀어지게 했다.

시인은 44년 전 자신의 인생을 바꾼 일화를 들려줬다. 세상을 등질 생각으로 전북 부안의 직소폭포에 갔었다고 한다. “눈을 감고 몇 시간을 앉아 있는데, 어디선가 ‘너는 죽을 만큼 살았느냐’는 목소리가 들렸어요. 눈을 떠보니 아무도 없고, 폭포 소리만 요란했습니다. 죽을 만큼 살지 못했다는 생각에 다시 살기로 했죠.” 그가 대표작으로 꼽는 시 ‘직소포에 들다’가 그렇게 탄생했다. ‘하늘이 바로 눈앞인데/ 이곳이 무한천공이란 생각이 든다/ 여기 와서 보니/ 피안이 이렇게 좋다// 나는 다시 배운다// 絶唱(절창)의 한 대목, 그의 완창을.’(‘직소포에 들다’ 일부)

시인은 초기 작품에선 절망 속 인간의 실존을 그려냈지만, 여섯 번째 시집 ‘마음의 수수밭’(1994)부터 희망의 선율을 노래하기 시작했다. “상처를 꽃으로 피우는 게 내 시의 주제”라고 말하는 그는 고통의 세월에서 희망을 길어 올린다. ‘바람은 자꾸 등짝을 때리고, 절골의/ 그림자는 암처럼 깊다. 나는/ 몇 번 머리를 흔들고 산 속의 산,/ 산 위의 산을 본다. 산은 올려보아야/ 한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저기 저/ 하늘의 자리는 싱싱하게 푸르다./(중략)/ 절벽을 오르니, 千佛山(천불산)이/ 몸속에 들어와 앉는다./내 맘속 수수밭이 환해진다.’(‘마음의 수수밭’ 일부) 시인은 지금까지 아홉 권의 시집을 냈다. 현대문학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을 비롯한 상을 다수 받으며 작품 세계를 인정받았다. 2017년부터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천양희는 시인이란 직업을 ‘자연을 쓰는 서기’에 비유한다. “자연은 많은 생명을 품고 있어요. 그걸 받아쓰는 게 시라고 생각합니다.” 쓰는 과정은 치열하다. 그는 “적막이라는 무서운 짐승을 기다리는 사냥꾼처럼 고독하게 준비를 한다”라며 “종이의 모서리가 절벽과 같다고 생각한다. 그 절벽에서 안 떨어지려고 안간힘을 쓰며 시를 짓는다”라고 했다. “시인은 끊임없이 위기 의식을 가지며, 새로워지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시 쓰기는 제게 괴로운 기쁨입니다.”

시인의 오른쪽 엄지손가락은 비틀려 있다. 펜으로 글씨를 눌러 쓰는 탓에 관절염이 생겼다. “통증이 심해 항상 파스를 바릅니다. 손가락을 보며 더 열심히 써야겠다고 생각해요. 더 구부러져도 좋으니까요.”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아, 이번 수상 소감을 우체국에 가서 ‘빠른 등기’로 기자에게 부쳤다. “시집 수백권을 보낼 때도 일일이 손으로 주소를 쓰는데, 우체국 사람들이 감탄하더군요. 내 손으로 써도 되는데 기계의 힘을 빌려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디지털 사회는 전자 사막 같습니다. 위로받을 곳 하나 없지만, 시가 ‘오아시스’가 될 수 있어요.”

시인은 “상을 받는 기쁨이 크지만, 기뻐할 수만은 없는 슬픔이 함께 느껴진다”라고 했다. “폭우, 폭염으로 집과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슬픔을 봤습니다. 이 시대에 시인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이 커요. 시로 사람들의 마음을 빚어서, 마음을 살리는 게 시인의 일이겠지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어둠을 밝혀주는 시를 쓰고 싶습니다.”

만해대상은 만해 한용운(1879~ 1944) 선생의 삶과 그가 꾸었던 꿈을 기리는 상이다. 2023만해대상 시상식은 만해축전(8월 11~14일) 기간인 8월 12일 오후 2시 강원도 인제읍 하늘내린센터에서 열린다. 만해축전은 설악·만해사상실천선양회와 강원도, 인제군, 동국대 그리고 조선일보사가 공동주최한다.

[이영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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