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 ‘에버6’이 26일 서울 중구 국립극장 연습실에서 국립국악관현악단을 지휘하고 있다. 국립극장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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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국악관현악단 단원들이 모인 26일 서울 중구 국립극장 연습실 한가운데에 로봇이 있었다. 표정 없는 회색 얼굴이 까만 눈으로 단원들을 응시했다. 로봇이 지휘봉을 위아래로 까닥거리며 흔들자 연주가 시작됐다. 로봇이 혼자 지휘한 <말발굽 소리>는 몽골 대초원을 달리는 말처럼 빠른 박자였고, 인간 지휘자 최수열과 함께 지휘한 <감>은 고요하게 시작해 회오리치듯 변했다. 음악이 끝나자 최수열은 로봇의 팔을 살짝 잡으며 ‘악수’를 했다.
로봇은 인간 지휘자를 대체할 수 있을까. 국립국악관현악단은 오는 30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로봇이 지휘자인 공연 <부재(不在)>를 선보인다. 로봇이 지휘자인 공연은 국내에선 처음이다. 이번 공연에는 한국생산기술연구원이 1년간 개발한 안드로이드 로봇 ‘에버6’이 지휘봉을 잡는다. 2006년 5월 ‘에버1’이 개발된 이후 17년 동안 사람에 가깝게 진화해왔다.
부산시립교향악단 음악감독 최수열은 이날 기자들과 만나 “로봇이 예술 영역에 접근하기는 무리라고 생각했는데 지휘자나 연주자가 보기에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으로 동작이 섬세하게 발전했다는 것이 놀랍다”며 “오늘 아침 리허설 때도 원래 가졌던 생각이 많이 무너졌다”고 말했다.
에버6이 음악을 알아듣고 단원들과 교감하며 지휘하는 것은 아니다. 모델 지휘자인 정예지의 지휘 동작을 3차원 좌표로 변환해 최적화한 디지털 정보를 학습해 그대로 움직인다. 에버6의 양팔에는 각각 7개의 모터가 장착됐지만 지휘는 급격한 방향·속도 변화가 많아 아직 인간만큼 정교할 수는 없다. 다만 에버6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한 박자로 지휘하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최수열은 “사실 로봇이 지휘자의 영역을 대체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며 “지휘자는 공연 이전에 악단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리더의 역할이 중요한데 에버6에는 이런 기능은 없다”고 말했다. “에버6에는 연주자와의 호흡이 없죠. 모든 음악에 당연한 호흡을 배려하지 않으니까 진짜 기계적으로 정확한 박자로 지휘하지만 너무 불편한 거예요. 사람이 부재한 상황에서 오히려 사람들끼리 교감하며 로봇에 맞춰 연주하는 걸 느껴요.”
로봇 ‘에버6’과 지휘자 최수열이 26일 서울 중구 국립극장 연습실에서 국립국악관현악단을 지휘하고 있다. 국립극장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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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1부에서 에버6은 비얌바수렌 샤라브 작곡 <깨어난 초원>과 만다흐빌레그 비르바 작곡 <말발굽 소리>를 지휘한다. 반복적인 움직임을 정확히 수행하는 에버6에 어울리는 곡을 최수열이 골랐다. 최수열은 황병기 작곡 가야금 협주곡 <침향무>를 지휘한다. 2부에선 에버6과 최수열이 손일훈 신작 <감>을 동시에 지휘하고, 이어 최수열이 김성국 작곡 국악관현악곡 <영원한 왕국>을 지휘하며 마무리한다.
손일훈이 처음부터 로봇 지휘자와 협력하는 점을 염두에 두고 작곡한 <감>은 오선지 악보가 없는 곡이다. 연주자들은 정해진 규칙 속에서 교감을 통해 즉흥적으로 선율을 채워 나간다. 에버6은 정확한 시점을 반복적으로 지시해 각자의 소리가 방향을 잃지 않도록 길잡이 역할을 한다. 손일훈은 “인간이 가진 것 중에서 로봇이 따라오기 가장 어려운 것은 교감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악단 예술감독 직무대리인 여미순은 악장을 맡아 아쟁을 연주한다. 여미순은 “첨단기술이 발전하면서 인간의 역할을 대체할 수 있을지가 중요해졌는데 한 명의 예술가로서 절대불가침의 영역이 예술에는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다”고 말했다.
한국생산기술연구원은 지난해 11월부터 ‘챗GPT’ 같은 생성형 인공지능(AI)을 로봇에 적용하는 연구를 하다 국립극장의 제안을 받아 이번 공연에 참여했다. 향후 인공지능 로봇이 어떤 지휘를 할 것인지는 미지의 영역인 셈이다.
로봇 ‘에버6’과 지휘자 최수열이 26일 서울 중구 국립극장 연습실에서 국립국악관현악단을 지휘하고 있다. 국립극장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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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버6을 개발한 이동욱 수석연구원은 “물리적 서비스 측면에서만 로봇 기술을 연구해왔는데 감성 표현의 영역도 가능성이 있는지 들여다보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로봇 분야에 새로운 기술이 도입되면 무궁무진 발전할 수 있어요. 지휘자가 원하는 보조적 도구로 활용할 수 있도록 여러 지휘자들의 데이터를 학습해 지휘 동작을 자동으로 생성하는 로봇을 개발할 계획이죠. 의사를 도와주는 수술 로봇처럼 지휘자를 도와주는 로봇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최수열은 “모든 예술적 영역을 로봇이 대체하는 그런 시대가 쉽게 올 것 같지는 않다”면서도 “공존하며 만들어낼 수 있는 부분은 있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정확하고 반복적인 연습이 필요할 때가 있는데, 로봇은 동작을 입력하기만 하면 오류 없이 끝까지 가죠. 트레이닝은 흔들리지 않고 눈치도 보지 않는 방식이 도움이 되는 면도 있어 로봇이 트레이너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허진무 기자 imagin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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