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집 ‘2024 한식아카데미’
한식 사랑하는 내·외국인 한식 문화 체험
배우고 만들며 각지 향토음식 재현
경향신문 노정연 기자가 지난 14일 서울 중구 한국의집에서 열린 ‘2024 한식아카데미’에 참여해 제주의 대표 음식인 돔베고기를 만들고 있다. 정지윤 선임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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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잔칫날 먹던 돼지고기, ‘돔베고기’
국가유산진흥원이 운영하는 한국의집(서울 중구)에서는 올가을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각 지역 대표 음식을 만들고 체험하는 ‘2024 한식 아카데미’를 진행 중이다. 궁중음식을 비롯해 진주, 진도, 제주, 강릉의 대표 음식을 각 지역 전문가들과 함께 만들어 보는 수업이 매주 목요일 열린다. 일부 강좌는 K푸드에 관심이 높은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영어로도 진행된다.
이날 ‘제주의 맛’ 강좌에는 제주향토음식보존연구원의 양용진 원장이 강사로 나섰다. 수업 시간에 맞춰 한국의집 4층 취선관에 들어서니 깨끗하게 준비된 조리대와 조리기구들이 눈에 들어왔다. 만들어 볼 음식은 ‘돔베고기’와 ‘고기국수’ 그리고 ‘제주 (고사리)육개장’. 모두 돼지고기를 주재료로 하는 제주 음식이다.
지난 14일 서울 중구 한국의집에서 열린 ‘2024 한식아카데미’에 참여해 제주 향토 음식을 만들고 있는 노정연 기자. 2024.11.14. 정지윤 선임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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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는 독특한 돼지고기 음식문화가 있다. 마을에 큰일이나 잔치가 있을 때 돼지를 잡는 것부터 음식을 만들고 손님상을 차리기까지 전반을 마을 ‘도감(都監)’이 관장했다. 돼지고기를 관리하는, 행사의 총괄 셰프가 있던 셈이다. 도감의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준비한 음식을 소외되는 사람 없이 나누는 것이었다. 아이와 어른, 잔치에 오지 못한 마을 사람들도 동등하게 음식을 배분받았다고 하니 섬이라는 제한된 공간 안에서 자급자족해야 했던 제주인들의 공동체 의식을 엿볼 수 있다.
제주 돼지고기 음식에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돔베고기’다. ‘돔베’는 ‘도마’를 뜻하는 제주 방언으로, 삶은 돼지고기를 나무 도마에 얹어 따뜻하게 썰어 먹는 제주식 돼지 수육을 돔베고기라고 한다. 돼지고기를 삶은 후 고기는 수육으로 먹고 육수도 다양하게 활용한다.
돼지고기는 끓는 물이 아닌 미지근한 물에 넣어 삶는다. 노정연 기자 |
돔베고기를 만드는 방법은 간단하다. 물에 된장을 풀고 돼지고기를 넣어 삶으면 끝이다. 고기는 전지(앞다리)나 후지(뒷다리) 어느 부위든 상관없다. 이날은 손질된 삼겹살(1㎏)을 사용했는데 제주에선 지방이나 껍질을 제거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한다. 고기를 삶을 때는 끓는 물이 아닌 미지근한 물(50~60도)에 넣는다. 육수를 쓸 때는 찬물에, 고기를 쓸 때는 끓는 물에, 고기와 육수를 둘 다 먹을 때는 미지근한 물에 고기를 넣어야 고기도 알맞게 익고 육수도 잘 우러난다. 삶는 시간은 50분 정도. 고기가 익으면 불을 끄고 10분간 뜸을 들인 후 꺼낸다. 이때 꺼낸 고기를 얼음과 식초를 넣은 찬물에 잠깐 담갔다 썰면 육질이 탱탱해져 고기가 부스러지지 않는다. 고온다습한 제주에선 삶은 고기가 금방 상하는 것을 막기 위해 식초나 술을 사용했다. 찬물에 겉면을 식힌 돼지고기를 단면이 잘 보이도록 비스듬히 썰어 초간장과 함께 내면 제주식 돼지고기 수육 돔베고기가 완성된다.
■귀한 손님 대접 음식, 고기국수
완성된 제주 고기국수. 정지윤 선임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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돔베고기를 만들고 나니 왠지 모를 자신감이 생겼다. 바로 고기국수 만들기에 돌입했다. 진한 육수와 쫄깃한 면발, 담백한 고기 맛이 어우러지는 고기국수는 제주를 찾는 이들이 꼭 한 끼 챙겨 먹을 정도로 인기 있는 제주 음식이다. 본래 제주도에선 혼례일이나 잔칫날이 되면 돼지를 잡아 삶은 물에 모자반을 넣고 ‘몸국’을 끓여 먹었는데, 일제강점기에 톳과 모자반 등 해조류가 공출당하며 몸국을 끓일 수 없게 되자 모자반 대신 국수를 돼지고기 육수에 말아 먹었다고 한다.
고기국수를 만들고 있는 모습. 찬물에 헹군 고기국수면은 국물에 토렴해 따뜻하게 데운 뒤 그릇에 담는다. 정지윤 선임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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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국수는 돼지고기를 삶은 육수와 잡뼈 육수를 섞어 국물을 만든다. 잡뼈 육수가 없을 땐 사골 육수를 넣기도 한다. 팔팔 끓는 육수에 소금과 조선간장으로 간을 한 후 얼갈이배추와 대파를 어슷 썰어 넣고 달걀도 하나 풀어 넣는다. 달걀은 귀한 손님을 대접한다는 의미다. 국물을 만드는 동안 면도 삶는다. 면은 중면을 삶은 뒤 찬물에 헹궈 둔다. 면을 그릇에 담을 때는 국물에 토렴해 따뜻하게 만든다. 데워진 면을 그릇에 담고 국물을 부은 후 앞서 만들어 놓은 돔베고기 네다섯 점 정도를 올리니 제주에서 먹었던 그 고기국수와 얼추 비슷한 모습이 나온다. 취향에 따라 고춧가루와 후추를 뿌리고 제주식으로 콩나물을 함께 넣어 먹기도 한다.
■한입 가득 들어차는 제주의 맛, 고사리육개장
고기육수에 메밀가루를 물에 개어 넣으면 고기 지방과 기름을 메밀가루가 흡수하고 국물이 진해진다. 정지윤 선임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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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여행에서 처음 고사리육개장을 맛본 순간을 잊지 못한다. 제주시 ‘○○해장국’에서 대기표를 받고 2시간을 기다렸다. 도대체 무슨 맛이길래 육개장 한 그릇 먹자고 이 많은 사람이 기다리나 싶었다. 기다림 끝에 드디어 맛본 고사리육개장은 당황스러운 비주얼에도 불구하고 배고픔을 한순간에 잊게 할 정도로 맛있었다. 찬 바람이 불 때면 후루룩 목구멍을 넘어가는 구수한 그 맛이 생각난다. 사실 한식 아카데미 강좌에 참여한 가장 큰 이유가 이 고사리육개장 때문이었다.
고사리육개장을 만들 때는 푹 삶은 고사리와 돼지 수육을 함께 찧어 부드럽게 만드는 것이 관건이다. 정지윤 선임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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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잔칫날 돔베고기를 먹고 난 후 물러지거나 남은 자투리 고기를 고사리와 함께 넣어 끓인 것이 고사리육개장이다. 제주도에서 나는 고사리는 예로부터 ‘귈채’라 불리며 임금님 진상품으로 올려질 정도로 맛과 향이 뛰어나기로 유명하다. 고사리육개장은 고사리와 돼지고기를 최대한 부드럽게 만드는 것이 관건이다. 먼저, 말린 고사리를 세 번 이상 뜨거운 물에 불리고 두 시간 이상 삶는다. 잘 삶아진 고사리(150g)와 돼지 수육(200g)을 절구에 찧어 두 재료가 ‘한 몸’인 상태로 만들어야 부드러운 고사리육개장의 식감이 완성된다. 절굿공이 아래 고사리는 별다른 저항 없이 뭉개지는데 고기를 찧기가 쉽지 않다. 자꾸 절구 밖으로 튀어 오르는 돼지고기를 붙잡느라 절구질에 적잖이 힘이 들어갔다. 충분히 익힌 돼지고기를 칼로 한번 으깨 넣거나, 양이 많을 경우 아예 고사리와 고기를 믹서에 갈아버리는 것도 방법이다.
완성된 고사리육개장. 정지윤 선임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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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서로 뒤엉켜 ‘한 몸’이 된 고사리와 돼지고기를 돼지고기 육수(500㎖)와 사골 육수(100㎖), 잡뼈 육수(200㎖, 없으면 사골 육수로 대체)를 섞은 국물에 넣고 끓이다 대파를 썰어 넣는다. 파를 넣어야 육개장이 쉽게 상하지 않는다. 여기에 다진 마늘과 다진 생강, 조선간장으로 간을 맞춘 후 메밀가루 반 숟갈 정도(50g)를 물에 개어 넣으면 고기 지방과 기름을 메밀가루가 흡수하고 국물이 진해진다. 뭉근하게 끓인 고사리육개장을 그릇에 담고 고춧가루와 후추를 뿌리면 완성. 실처럼 가늘게 엉킨 고사리 가닥과 고기를 숟가락에 올려 후루룩 넘기니 구수한 고사리 향과 어우러진 육향이 입과 코에 가득하다. 제주 자연의 맛, 2시간을 기다려 먹은 그때 그 고사리육개장과 비슷한 맛이 난다.
■제주 음식 만들고 맛보며, 3시간 제주 여행
이날 ‘제주의 맛’ 수업을 진행한 제주향토음식보존연구원의 양용진 원장. 노정연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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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음식은 양념을 많이 쓰지 않고 조리법도 간단합니다. 재료가 신선하고 좋기 때문에 조리법이 복잡할 필요가 없어요.”
세 가지 음식을 완성하고 나니 수업 초반 양용진 원장이 한 말에 수긍이 갔다. 그는 이날 요리 선생님이자 제주 여행 가이드였다. 제주 음식을 직접 만들며 음식에 담긴 제주 역사와 자연환경, 정체성을 탐구하고 나니 강좌가 진행된 3시간 동안 제주를 여행하고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무엇보다 제주도에 가야 먹을 수 있었던 귀한 향토 음식들을 집에서도 만들어 먹을 수 있게 돼 뿌듯했다. 돼지고기와 국수, 고사리만 있으면 여행에서 맛본 그 맛을 재현할 수 있으니 도전해보길 권한다.
양용진 원장의 제주 향토음식 이야기를 들으며 요리를 만들다보니 수업시간 3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완성된 고사리육개장(위 왼쪽)과 고기국수(위 오른쪽), 돔베고기(아래). 정지윤 선임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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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가을 총 8회에 걸쳐 진행된 한국의집 한식 아카데미는 오는 28일 ‘한국의집 다과 만들기’ 수업을 끝으로 마무리된다. 내년부터는 사회배려자, 장애인, 외국인 등 참여 대상을 확대해 상시 운영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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