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참호 안에서 혼자 살아남은 러시아 병사가 우크라이나 드론을 향해 팔로 'X'를 그리며 죽이지 말아달라는 신호를 보내는 모습. /WSJ |
지난 5월 9일(현지 시각) 우크라이나 동부 최대 격전지인 바흐무트. 포격에서 홀로 살아남은 한 러시아 병사 머리 위로 우크라이나 드론 한 대가 윙윙거리며 날아다녔다. 참호 안에서 드론을 발견한 병사는 팔로 ‘X’자를 그리며 자신을 쏘지 말아달라고 했고, 이어 두 손을 모으며 살려달라고 수신호를 보냈다.
이 모습은 우크라이나 제92기계화보병여단 지휘소 모니터에 실시간으로 전달됐다. 우크라이나 군은 함정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나 상의 끝에 그를 생포하기로 했다. 식량 배급 봉투에 흙을 가득 담고 러시아어로 ‘드론을 따라오라’고 적은 뒤 드론에 매달아 보내 참호 근처에 떨어트렸다.
목숨을 애원한 병사는 참호 밖으로 기어나가 이 물건을 들고 다시 참호 안으로 들어왔다. 글을 읽은 그는 드론을 보며 자신의 목을 긋는 시늉을 한 뒤 고개를 저었다. ‘만약 투항하고 드론을 따라가도 나를 죽이지 않을 것이냐’고 재차 물어본 것이었다. 우크라이나 군으로부터 살려주겠다는 답 신호를 받은 병사는 드론을 따라갔다. 이 영상은 지난달 우크라이나 군이 공개하면서 화제가 됐다.
우크라이나 바흐무트 전투에서 살아남은 한 러시아 병사가 '따라오라'는 쪽지를 읽은 뒤 우크라이나 드론을 향해 '자신을 죽이지 않을 것이냐'는 신호를 보내는 모습./ WSJ |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드론을 향해 목숨을 애원했던 이 러시아 병사와의 인터뷰를 지난 14일 보도했다. 우크라이나군은 약속대로 그를 죽이지 않았고, 현재 하르키우 한 구금시설에서 지내고 있었다.
이 병사의 이름은 루슬란 아니틴(30)으로 징집병이다. 그는 주민이 약 5000명인 작은 도시 이드리차에서 주류가게를 관리하며 아내와 어린 딸과 살고 있었다. 지난해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을 때만 해도 그는 닥칠 운명을 몰랐다. 소셜미디어에 ‘파시스트를 처벌하자’ 같은 글이나 러시아 국기를 올리며 전쟁을 지지했다고 한다.
지난해 9월 날벼락이 떨어졌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예비역을 대상으로 부분 동원령을 발령한 것이었다. 아니틴도 주말 저녁에 소집 통보를 받았다. 그는 훈련소로 가기 전날 밤 미리 가족과 작별인사를 나눴고, 아내와 곤히 잠든 딸을 두고 동이 트기 전 집을 나섰다. 도착한 훈련소에선 아니틴에게 소총과 군복을 나눠줬다. 몇주의 훈련 동안 그는 소총을 딱 두발 쏜 게 전부였다고 한다.
당초 훈련소는 아니틴에게 러시아 국경에서 일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한 달 만에 우크라이나 동부 루한스크에 배치됐다. 이곳에서도 경비와 진지 구축 업무를 맡았다. 그러다 지난 5월 우크라이나가 바흐무트 재공격에 나서면서 갑자기 전투에 투입됐다. 바흐무트는 당시 7개월 넘게 격렬한 전투가 이어지고 있는 곳이었다. 선봉대인 러시아 용병부대 바그너 그룹의 한 지휘관은 아니틴과 함께온 병사들을 참호로 안내하면서 ‘우크라이나 진지와 가까운 참호로 가서 자리를 잡고 몸을 숨기라’는 명령을 전달했다. 그러면서 “임무를 거부해도 즉시 사살되고, 후퇴해도 사살된다”고 경고했다.
전투에 투입되자마자 포탄이 쏟아졌다. 이들은 임무대로 잠시 공세가 멈춘 틈을 타 우크라이나 진지에서 불과 180m쯤 떨어진 참호로 달려가 몸을 숨겼다. 이곳에선 아침부터 저녁까지 포탄이 쏟아졌고, 그럴 때면 참호에 파놓은 굴로 몸을 숨겼다. 아니틴은 이 과정에서 머리와 가슴, 어깨 등에 부상을 입었다. 경비업무 때부터 함께해온 동료 병사들도 이 참호에서 죽어나갔다. 부상의 고통으로 스스로 총을 쏴 생을 마감한 이도 있었다. 아니틴은 WSJ에 “영원히 참호에 갇혀 있을 것 같았다”고 했다.
반나절 넘게 쏟아지는 공세에 아니틴은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그러다 우크라이나 드론이 공중에 날아다니는 걸 보고 투항하기로 했다. 뚜렷한 계획은 없었다. 그래도 생사의 갈림길에서 해볼 만한 행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아니틴과 수신호를 주고 받았던 우크라이나 드론 조종사는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전우들을 죽인 적군임에도 그의 모습에 동정심을 느꼈다”고 했다. 우크라이나 군의 답을 받은 아니틴은 결국 드론을 따라가기로 했다. 그는 시신을 넘으며 구불구불한 참호 안을 걸었다.
이윽고 참호 끝에 막다른 그는 밖으로 나왔다. 아니틴은 드론을 따라 걸으면서도 ‘이 길이 맞느냐’고 물었고, 그럴 때마다 드론은 위아래로 움직이며 ‘맞다’는 답을 보냈다. 길을 걸으면서도 아군과 적군의 폭격이 계속돼 목숨을 잃을 뻔한 상황들이 발생했다. 마침내 우크라이나 진영에 도착했을 때 아니틴은 군복을 벗고 무기들을 내려놓은 뒤 두팔을 높이 들었다.
지난 3월(현지시각) 우크라이나 바흐무트 인근 최전방에서 참호에 있는 우크라이나 군인들/ AP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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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틴은 다른 전쟁 포로들과 함께 수용소에서 지내고 있다. 적십자를 통해 가족들에게 편지를 보낼 수 있으나 아직 연락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니틴은 추후 포로 교환으로 러시아에 돌아가더라도 항복했기 때문에 본국에서 처벌받을 가능성이 크다. 그는 “러시아군이 나를 투옥해도 좋으니 가족에게 돌아가고 싶다. 이곳에서 목격한 것을 다신 경험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한 우크라이나 관리에 따르면, 동원령이 시작된 지난해 9월 이후 우크라이나군 핫라인을 통해 항복 의사를 밝히는 문의가 1만7000건 이상이라고 한다. WSJ는 “우크라이나가 최근 대반격을 시도하기도 전에 이미 러시아군의 사기는 떨어진 것처럼 보인다”고 했다.
[최혜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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