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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3 (토)

이슈 흔들리는 수입 곡물 시장

“우크라 곡물 의존 3억4500만명, 댐 붕괴 타격”... 세계 식량난 심화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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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7일(현지시각) 우크라이나 남부 헤르손주(州)의 노바 카호우카 댐의 모습. 사고 이틀째인 이날 댐 상부의 절반 쯤이 파괴돼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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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일(현지 시각) 우크라이나 남부 노바 카호우카 댐이 파괴된 여파로 전 세계에 식량 위기가 닥칠 수 있다는 경고가 잇따라 나오고 있다. 유엔 세계식량계획(WFP)이 댐 파괴로 지구촌 식량난이 심화할 가능성을 경고했다고 독일 dpa통신이 7일 보도했다. 마르틴 프리크 WFP 독일 담당 국장은 “댐이 붕괴해 대규모 홍수가 발생, 우크라이나 남부의 새로 심은 곡물이 훼손됐다”며 “이로 인해 우크라이나산 곡물에 의존해 온 전 세계 3억4500만명이 큰 타격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유럽 정책분석센터(CEPA)도 이날 “이번 사고로 (전쟁으로) 이미 빈약해진 우크라이나 곡물 수출 능력이 더욱 감소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카호우카 댐이 있는 드니프로강 일대는 우크라이나의 대표적 곡창 지대로, 카호우카 저수지에서 관개(灌漑)를 해왔다. 그러나 이 댐의 파괴로 홍수가 일면서 하류의 평야는 진흙과 화학 물질, 지뢰 등에 오염되고, 상류의 농지는 물 부족에 처하면서 우크라이나의 농업 생산량이 크게 줄어들게 됐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는 세계 밀 공급의 10%, 옥수수 공급의 15%를 차지하는 세계 5위의 곡물 수출국이다. 특히 드니프로강 유역은 ‘유럽의 빵 바구니’라고 불릴 만큼 풍부한 농업 생산량을 자랑하는 비옥한 우크라이나 흑토 지대의 중심이다.

이에 따라 지난해 러시아의 침공으로 우크라이나 농산물의 수출 길이 막혀 발생했던 세계적 곡물 가격 급등과 식량난이 재발할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당시 이집트와 시리아 등 중동 국가에서는 극심한 곡물 품귀 현상이 벌어졌고, 아프리카 전역에서 기아 현상이 심화했다. 당시 식량난은 지난해 11월 ‘흑해 곡물 협정’으로 흑해를 통한 우크라이나 곡물 수출이 재개되면서 가까스로 완화됐다. 그러나 이번엔 우크라이나의 곡물 생산 자체가 큰 타격을 받으면서 수출량이 크게 줄어들게 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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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일(현지 시각) 우크라이나 노바 카호우카 댐이 파괴되면서 물이 들어찬 헤르손주(州)의 드니프로 강변 크린키 마을의 침수 전후 상황을 담은 위성 사진. 왼쪽 사진은 댐이 파괴되기 전인 지난달 15일 찍은 것이고, 오른쪽 사진은 댐이 파괴되고 난 뒤인 7일 촬영한 것이다. /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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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농업부 조사에 따르면, 현재 드니프로강 서안 헤르손주(州) 농지 약 1만ha(헥타르·약 3000만평)가 물에 잠겼다. 러시아 점령지인 동안도 대규모 침수 피해를 봤다. 댐 상류 지역은 반대로 물 부족 피해가 우려된다. 우크라이나 농업부는 “헤르손주 관개 시설의 94%, 자포리자주의 74%가 물 부족을 겪을 수 있다”고 전망했다. 우크라이나의 농경지는 총 3300만ha로, 이 중 3~6%에 달하는 100만~200만ha가 직간접적 영향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우리나라 전체 농경지(160만ha)와 맞먹는 규모다.

댐 파괴에 따른 주변 피해를 복구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전망이다. 강물과 토사가 하류 지역 일부를 뒤덮은 데다, 강 유역 산업 단지에서 각종 화학·독성 물질이 함께 쓸려 내려와 농지를 오염시켰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또 전쟁 중 매설된 지뢰 수만 개가 유실돼 마을과 농경지 등에 떠내려 온 것으로 추정된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피해를 복구하는 데 짧게는 수년, 길게는 수십 년이 걸릴 수 있다”고 전망했다.

댐 파괴로 카호우카 저수지 수위가 계속 낮아지면서, 이곳에서 냉각수를 끌어 쓰는 자포리자 원전의 안전 문제도 불거지고 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이날 “저수지 수위가 댐 폭파 당일에만 1m가량 떨어져 14m대가 됐다”며 “수위가 12.7m 아래로 내려가면 물을 끌어올리기 어려워진다”고 밝혔다. 냉각수가 부족해지면 원자로와 사용 후 핵연료를 식힐 수 없게 돼 핵 연료봉이 녹아내리는 등 대형 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 라파엘 그로시 IAEA 사무총장은 “다행히 원전의 냉각수가 충분해 앞으로 몇 달간은 저수지에서 추가로 물을 끌어오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서로를 댐 파괴의 배후로 지목하며 비난전을 이어갔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러시아는 우리의 (동남부) 대반격을 계속 두려워해 왔다”며 “러시아의 댐 파괴는 이 일대 우리 영토 수복을 어렵게 하려는 의도”라고 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댐 폭파는 대규모 환경·인도적 재앙을 초래한 (우크라이나의) 야만적 테러 행위”라며 “배후에 서방 국가들이 있다”고 했다.

이런 가운데 러시아 소행에 무게를 둔 외신 분석이 잇따르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다수의 공학 전문가를 인터뷰해 “댐의 파괴 원인은 구조적 문제나 외부 공격보다 고의적 폭파일 가능성이 높다”고 전했다. 댐이 위치한 지역은 러시아가 점령·통제해 왔다. 미국의 소리(VOA) 방송은 “전문가 다수의 의견은 우크라이나의 포격으로 댐이 부서졌다는 러시아의 주장과 배치된다”며 “러시아의 소행이란 의견이 힘을 얻고 있다”고 전했다.



[파리=정철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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