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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5 (금)

이슈 5·18 민주화 운동 진상 규명

대구서 ‘군’에 끌려가 모진 고문…“5·18 정신 전국화해야 사회 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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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시위 중 체포된 대학생 김균식씨

한겨레

지난 12일 대구시 중구 5·18민주화운동부상자회 경상·강원지부 사무실에서 <한겨레>와 만난 김균식 지부장. 김규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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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범벅 된 나를 밟고 또 짓밟는데, 그 사람들 충혈된 눈동자와 살기 띤 얼굴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지난 12일 대구시 중구 5·18민주화운동부상자회 경상·강원지부 사무실에서 <한겨레>와 만난 김균식(65) 지부장은 43년 전 기억을 힘겹게 떠올렸다. 1980년 5월14일 오후 계명대 재학생이던 김 지부장은 대구 중구 옛 대구백화점 본점 앞 광장에서 시위를 벌이다 같은 학교 총학생회장 배희진(69)과 함께 체포됐다. 처음 70일가량은 모진 고문에 시달렸다고 한다. “옷부터 벗기기 시작하더니 무릎을 꿇린 뒤, 무릎 사이에 각목을 끼우고 양쪽에 올라타 사정없이 밟아댔습니다. 토하고, 기절하고, 다시 깨어나기를 반복했습니다.” 그는 결국 포고령 위반 및 소요죄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김 지부장이 체포되던 날 대구백화점 앞에서는 “비상계엄 철폐” 등을 요구하는 경북대·계명대·영남대 3개 대학의 연합 시위가 계획돼 있었다고 한다. 계명대생 700여명은 이날 오후 3시께 대구백화점 앞에 가장 먼저 도착했지만 순식간에 진압당했다. 지휘부가 체포됐다는 소식을 들은 학생들은 곧장 남부경찰서로 몰려가 “구속 학생 석방하라”, “전두환 물러가라” 등을 외치며 시위를 이어갔다. 하지만 당시 김씨와 총학생회장이 붙잡혀간 곳은 제50보병사단 연병장이었다.

“평소 경찰은 시민들이 지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줬는데, 그때는 사방을 빈틈없이 에워싸고 ‘토끼몰이’ 하듯 달려들어 진압봉을 휘둘렀습니다.” 그는 당시 시위 진압 주체가 경찰이 아닌 군인이라고 기억했다.

한겨레

1980년 5월14일 계명대 학생들이 교문 밖으로 진출을 시도하는 모습을 찍은 <매일신문>의 사진 보도. 5·18민주화운동부상자회 경상·강원지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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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3개 대학 연합 시위는 실패로 돌아갔다. 경북대, 영남대 학생들도 각각 거리시위에 나서 대구 중심가까지 진출했지만, 교수들 설득에 대부분 학교로 돌아갔다. 계명대 지도부가 연행됐다는 소식에 일부 학생들만 남아 시내에서 산발적인 시위를 벌였다. 국가기록원 자료를 보면, 당시 50사단으로 연행된 이들은 147명인데, 여기엔 민간인 56명이 포함됐다. 계명대에는 15일 자정 전국 첫 휴교령이 내려졌다.

김 지부장은 1998년 5·18국가유공자로도 인정받았다. 그는 “5·18민주화운동의 시공간적 범위를 ‘80년 5월’과 ‘전국’으로 확장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광주·전남에 견줄 바는 아니지만, 타지역에서 겪은 육체적·정신적 고통은 상당했습니다. 대구·경북의 80년 5월 투쟁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습니다. 이렇게 5·18 정신을 확장해야 사회통합도 가능합니다.”

김규현 기자 gyuhy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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