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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3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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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보다 재밌는 창극, '판소리 아이돌' 정년이가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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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절대 엄니처럼은 안 살 거요! 두고 보쇼! 지금은 두 발로 나가지만 올 때는 자가용 끌고 올텡께!"

소리꾼의 재능을 타고 났지만 정식으로 소리를 배우는 대신 장터에서 조개를 팔아 가족을 부양하는 목포 소녀가 기어이 선전포고를 한다. '소리'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가겠다는 선언이다.

집을 나와 그 길로 찾아간 서울의 매란국극단. 단장을 붙잡고 연습생으로 받아 달라고 애원하지만 돌아온 답은 "조개나 내다 팔아라"는 싸늘한 거절이다. 하지만 그는 목포로 돌아가지 않는다. 대신 극단 소품을 나르는 차량에 기어 들어가 시위하듯 밤을 지새운다. 창극 '정년이'의 주인공 정년이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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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극 '정년이'에서 주인공 정년이 역을 맡은 이소연(왼쪽), 조유아 배우. 사진 국립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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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년이'는 원작인 동명의 네이버 웹툰을 각색한 창극이다. 1950년대 여성국극단을 배경으로 소리꾼이 되려는 목포 소녀 윤정년과 동료 단원들의 성장기를 그렸다. 고전 소설, 그리스 신화, 영화 등을 원작으로 창극을 만들어온 국립창극단이 웹툰 원작의 창극을 선보이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정년이'에서 주인공 윤정년 역할을 맡은 국립창극단원 이소연(39)·조유아(36)를 14일 국립극장에서 만났다.

두 배우는 모두 내로라하는 소리꾼이다. 조유아는 일찍이 국악 신동으로 이름을 날린 실력파다. 무형문화재인 조오환 진도 소리 명창이 그의 아버지다. 또 다른 정년이 이소연은 창극 '춘향'에서 성춘향, '서편제'에서 송화 역을 맡아온 국립창극단 간판스타다. 이들은 "주인공 정년이가 저희와 같은 소리꾼이기 때문에 캐릭터에 몰입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고 입을 모았다.

이들에게 창극의 매력을 묻자 "악보로 전달되는 오페라나 뮤지컬 곡과 달리 창극의 소리는 구두로 전승되기 때문에 멜로디에 갇히지 않고 더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국악 뮤지컬이라 할 수 있는 창극은 줄거리·연기·노래가 있다는 점에서 뮤지컬이나 오페라와 비슷하다. 다만 악보로 기록되는 뮤지컬 '넘버'나 오페라의 '아리아'와 달리 창극을 구성하는 판소리는 구두로 전승된다.

창극 '정년이'의 음악 감독을 맡은 소리꾼 이자람 역시 곡을 지은 뒤 이를 직접 녹음해서 두 배우에게 들려줬다. 창극의 매력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소리를 하는 배우가 곡을 창의적으로 해석하고 비틀 수 있는 여지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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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극 '정년이'에서 주인공 정년이 역을 맡은 조유아(왼쪽), 이소연 배우가 극의 한 장면을 연습 중인 모습. 사진 국립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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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극장가 트렌드인 관객 참여형, 체험형 공연의 정점에 있는 게 창극"이라고도 했다. 객석 여기저기서 "잘한다", "그렇지"를 외치는 관객들의 추임새가 터져 나와 무대와 객석이 한데 어우러진다는 이유에서다.

이소연은 "연습 중 울컥하는 때가 많았다"고 했다. "모든 대사들이 소리꾼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기 때문이란다. 그는 "목포에서 상경해 꿈을 좇다가 때로는 좌절하는 정년이를 보면서 변성기 때문에 소리를 포기하려고 했던 과거의 제 모습이 떠올랐다"며 "여성국극의 부흥기를 연기할 수 있어서 영광이다. 단원들도 모두 국극을 일으켜보자는 마음으로 연습하고 있다"고 했다. 1950년대 성행했던 여성국극은 여성 배우들로만 꾸려져 있는 '국악 뮤지컬단'이다. 여성 배우가 이몽룡부터 방자까지 모든 남자 역할을 맡는다.

조유아는 정년이처럼 부모의 반대를 겪었다. 그는 "제가 청소년기 목소리가 변해 힘들어하는 것을 보면서 아버지는 '왜 힘든 길을 가냐'며 반대했다. 하지만 지금은 누구보다 열정적인 팬이다"라며 웃었다. 그러면서 "정년이는 소리꾼들의 이야기지만 크게는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며 "좌절과 성취를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라고 덧붙였다.

창극 정년이는 국립창극단의 역대 공연 중 가장 빠르게 전회차가 매진됐다. 지난달 캐스팅이 공개되기도 전에 모든 좌석이 팔려 공연을 3회 연장했다. 이소연은 인기 비결로 "고전 소설이나 설화가 아닌 동시대 웹툰을 원작으로 하기 때문에 쉽게 즐길 수 있다"는 점을 꼽았다.

조유아는 "극 중 배역이 대부분 소리꾼이기 때문에 어떤 극보다 몰입도가 높다"며 "모두가 내 얘기라고 생각하고 연기를 한다. 연습 분위기도 무척 열정적이다"라고 했다. 여자끼리 시기 질투하고 서로 깎아내리는 진부한 서사에서 벗어나, 여성 국극단원들이 연대하고 성장해가는 모습에 열광하는 2030 여성 팬들도 상당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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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 '정년이' 커버. 사진 네이버웹툰



창극은 국악 입문자들이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장르이기도 하다. 여러 배우가 등장해 소리와 춤을 통해 기승전결이 있는 이야기를 펼쳐 보이는 종합 예술이기 때문이다. 뮤지컬 공연처럼 회전형 장치를 써서 시시각각 무대가 변하는 것을 보는 재미도 크다.

'판소리는 잘 안 들린다'는 선입견을 깨고 싶다는 이소연은 "소리꾼들의 딕션이 굉장히 정확하다. 자막이 필요 없을 정도다"라고 자부했다. 그는 17일 초연을 앞두고 "무대에서 연기하는 꿈을 꿀 만큼" 정년이에 푹 빠져있다. 조유아는 "창극이 이렇게 재밌는 장르라는 걸 '정년이'를 통해 알리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공연은 17일부터 29일까지 국립극장에서 열린다.

홍지유 기자 hong.jiy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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