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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수의 오마이갓] ’전원일기’ 연상시키는 시골교회의 100년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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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의성 중리교회 100년사 펴내

조선일보

경북 의성 중리교회 전경. 왼쪽은 현재 사용하는 새 예배당, 오른쪽은 1928년에 지은 첫 예배당을 복원한 한옥 예배당. 오른쪽엔 옛 종탑도 보인다. 한옥 예배당과 종탑은 의성군 문화유산이다. /중리교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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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인 50명 작은 교회...차임벨, 복사기 기증 사연도 수록

‘이영숙 성도-차임벨 기증. 차임벨, 녹음기 카세트, 앰프, 확성기 3대 기증(₩105,000원)한 이영숙씨에게 감사를 표하기로 가결하다.(제 24회 1974. 8. 21 당회록)’

경북 의성군 춘산면 중리교회(고관규 담임목사)가 펴낸 ‘중리교회 100년사’에 실린 한 대목입니다. 이 부분을 읽으니 1970년대 중반 동네 교회에서 울리던 차임벨 소리가 기억났습니다. 당시 도시 교회들도 줄을 당겨 울리는 종(鐘) 대신 전자음이 울려퍼지는 차임벨을 설치하곤 했지요. 이 무렵 중리교회도 한 성도님이 첨단 트렌드인 차임벨을 설치했던 것입니다. 당시 의성 첩첩산중에 울려퍼졌을 차임벨 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는 듯 했습니다. 차임벨 기증 외에도 ‘아름다운 헌신’이란 장(章)에는 청기와를 기증한 이종칠 장로님, 이 교회 출신으로 장신대 총장을 지낸 이종성 박사님이 복사기를 기증한 사연, 재산을 기증한 신태분 권사님, 박순애 권사님의 에피소드도 실렸습니다. 100년사에는 수록되지 않았지만 2009년엔 한 교인이 “이름을 밝히지 말고 교회를 위해 써달라”고 1000만원을 담임목사님께 기증해 꽃밭과 잔디밭 등 조경을 할 수 있었답니다.

저는 예장합동 교단에서 발행하는 ‘기독신문’에 실린 ‘의성 중리교회 100년사 출판 및 예배당 복원’ 기사를 읽고 관심이 생겨 100년사를 구해 읽었습니다. 이 교회는 현재는 주일예배 참석인원이 50명 남짓인 전형적인 시골교회랍니다. 교인들은 대대로 이곳에서 살아온 분들이고요. ‘100년사’를 읽으니 작은 시골교회이지만 목사님과 교인들의 100년 역사에 대한 자부심과 교회 사랑이 담백하게 느껴졌습니다. 문장 한 줄 한 줄이 그렇게 정성스러울 수 없었습니다. 자극적인 사건이 줄을 잇는 요즘 드라마가 아니라 평화로운 농촌드라마 ‘전원일기’가 연상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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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 중리교회의 첫 예배당 내부. 초창기의 강대상과 풍금을 보존하고 있다. 예배당 가운데 기둥 3개엔 광목 천을 막아 남녀 자리를 구분하기도 했다. /중리교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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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교회는 1919년 최씨, 김씨 등 이름을 알 수 없는 두 여인이 빙계동 서당에서 최초로 복음을 전한 이후 1920년 3월 박문호 영수와 김한권 추문구 임유춘씨를 전도해 서당에서 첫 예배를 드린 것이 시작입니다. 이어 1922년 미국 출신 위철치(조지 윈·1882~1963) 선교사에 의해 교회가 설립됐습니다. 1928년에 한옥 예배당을 지었고, 1974년 두번째 예배당, 2003년 현재의 세번째 예배당을 완공했습니다. 처음 명칭은 ‘빙계 교회’였으나 1981년 ‘중리 교회’로 개칭했지요.

◇온 교인들 벽돌 찍어 새 예배당 건축

책에는 1957년 이 교회 의결기구인 당회(堂會)가 조직된 이후 2019년까지 모두 185회 열린 당회의 주요 의결 사항이 실렸습니다. 이 기록도 잔잔합니다. 교역자 청빙과 건물 개보수 등 사항이 적혀있고, ‘재정 관계로 교역자를 모시기 힘들다’(1964) ‘온 교회가 벽돌 찍을 모래 운반 작업을 하기로 하고 9월 25일에 작업하다’(1972)라는 내용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교회가 조용하게 신앙생활을 이어온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일제 치하이던 1930년대말 ‘사건’의 중심에 서기도 했습니다. 일제의 신사참배를 반대하던 권중하 전도사가 일제 경찰의 고문 후유증으로 순교한 것이지요. 당시 의성의 개신교계는 전국적 주목을 받았습니다. 일명 ‘농우회(農友會)’ 사건이지요. 평양 장로회신학교 출신 목회자들이 중심이 된 농촌계몽운동 단체 ‘농우회’를 일제가 탄압하며 의성경찰서는 의성교회 정일영 목사와 오진문 장로뿐 아니라 대구의 유재기 목사와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담임하던 주기철 목사까지 잡아들였습니다. 그 무렵에 권중하 전도사는 옥고를 치르고 풀려났지만 후유증으로 순교했습니다. 그러나 권 전도사는 개인적 신상 서류나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했습니다. 묘소와 유족의 존재도 확인할 수 없었고요.

◇증언 토대로 ‘순교자 몽타주 초상화’ 만들어 기념

당시 권 전도사는 의성 지역 효선교회 빙계교회(현 중리교회) 금천교회 옥정교회(현 춘산교회) 현리교회 산운교회 등 6개 교회를 순회하며 사역했습니다. 중리교회는 100주년을 앞두고 권 전도사의 발자취를 좇았습니다. 모래 밭에서 바늘 찾기였지요. 그렇지만 노력 끝에 ‘초상화’를 만들었습니다. 비결은 이렇습니다. 2019년 당시 93세였던 손사익 성도가 권 전도사의 딸과 초등학교 동창이었답니다. 손 성도님은 “당시 권 조사(助師)님은 키가 크고, 코도 오뚝했으며 옷은 흰 두루마기 한복을 입고 흰 중절모자를 잘 쓰셨다. 인사를 하면 ‘그리혀’하고 받으셨는데 말씨가 특이했다”고 증언했지요. 교회는 이 증언을 토대로 ‘몽타주 초상화’를 만들었습니다.

첫 예배당도 눈길을 끕니다. 1928년 건축된 예배당은 24평 면적에 정면 4칸, 측면 3칸으로 남녀 출입문이 따로 있고, 예배당 중앙의 기둥 3개는 광목 가림막을 걸쳐 남녀가 서로를 볼 수 없도록 돼 있습니다. 남녀칠세부동석의 옛 예배 풍경을 간직하고 있지요. 이 예배당은 복원돼 2016년 의성군 문화유산 제35호, 한국기독교역사사적지 제5호로 지정됐습니다. 담임목사님이 자료를 발굴해 의성군과 예장합동 교단을 설득한 덕분이지요. 예배당에는 권 전도사의 ‘초상화’가 걸렸고, 권 전도사 시절부터 사용한 강대상과 풍금도 그대로 전시돼있습니다. 또한 한옥 예배당 뒤뜰에는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님의 것이로다’는 로마서 구절을 새긴 권중하 전도사 순교 기념비도 세웠습니다.

‘100년사’의 2편(2부)는 ‘의성지방 초기 기독교사 연구’라는 제목의 논문입니다. 대구 달서교회 당회장이며 전(前) 총회역사위원장인 박창식 목사님이 집필했지요. 이 논문을 읽고 있으면 의성 지방에 어떻게 처음 복음이 전파돼 지금에 이르게 됐는지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 그동안 구전으로 전해지던 불확실한 내용도 꼼꼼히 따져서 기술한 덕분에 의성 지방의 교회 족보를 배울 수 있습니다. 이 논문 역시 고관규 담임목사님이 의성지방 초기 기독교사 연구의 권위자인 박창식 목사님께 부탁해 수록했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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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중리교회가 개최한 '고향교회 방문의 날' 행사 모습. /중리교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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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드리고 가고 싶은 예배당 짓고 싶었다”

출석 교인 50명 내외의 작은 시골교회로서는 100년사를 펴내는 작업도 쉽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고관규 담임목사님은 “당회에서 장로님들이 ‘목사님이 써주셔야 한다’고 해서 용기를 냈다”고 말했습니다. 책에 수록된 교인 사진 앨범을 보면 모두 표정이 편안해 보입니다. 책 말미엔 고 목사님이 원로 장로님들과 인터뷰한 내용도 실렸습니다. 인터뷰에서 오정한 원로장로님은 세번째 교회 건축과 관련해 “시골에 있으면서 시골다우면서도 지나가더라도 예배를 드리고 가고 싶은 교회, 아름다운 교회를 짓겠다는 마음이었다”고 했고, 손봉근 원로장로님은 “우리 교회 교인들이 봉사정신이 남다르게 있었으면!”이라고 말했습니다. ‘100년 교회’의 자존심, 자부심이 느껴졌습니다.

‘중리교회 100년사’를 읽으면서 한국 개신교 역사는 큰 교회뿐 아니라 이렇게 작은 시골교회가 튼튼한 실핏줄 역할을 제대로 해준 덕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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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수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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