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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9 (일)

파격의 연주자 유자왕 첫 내한 독주회…앙코르곡 연주만 12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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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낳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블라인드 연주회’ ‘튀는 패션’ 등

보수적인 서구 클래식계 곱지 않은 시선도

기량만큼은 세계 최고라는 평


한겨레

19일 서울 여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연주하고 있는 유자왕. ⓒmida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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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저녁, 3층부터 합창석까지 청중으로 꽉 들어찬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은 조금 달뜬 분위기였다. 중국 피아니스트 유자왕(35)의 첫 내한 독주회를 찾은 관객들은 이날 오전 날아든 임윤찬의 밴 클라이번 국제 콩쿠르 우승 낭보에 공연 전부터 다소 설레는 표정이었다.

이때 미리 공지한 연주 목록과 다를 거란 장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유자왕은 청중과 일종의 심리전을 펴는 듯했다. 예고된 공연 프로그램을 완전히 바꿔 연주했다. 다음 곡은 뭐지? 방금 연주한 곡이 뭘까? 예측불허의 선곡은 궁금증을 유발했다. 이는 청중을 연주에 더욱 집중하게 하는 효과를 불렀다. 공연 현장의 의외성, 즉흥성을 의도한 거라면 꽤 성공적인 기획이라고 해야겠다. 이번 공연에선 애초 프로그램북에 나온 베토벤의 소나타 18번과 우크라이나 작곡가 니콜라이 카푸스틴의 곡들은 만날 수 없었지만, 그가 연주한 네 곡의 슈베르트 작품은 아쉬움을 채우고도 남았다.

이런 그의 행보는 한국에서만이 아니다. 지난 4월 미국 뉴욕의 카네기홀 공연에선 연주할 곡목을 아예 공개하지 않았다. 일종의 ‘블라인드 연주회’였던 셈이다. 그런데도 티켓이 완판됐다. 무슨 곡이 됐든 유자왕이 하는 연주회는 가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청중이 판단했다는 얘기다. <뉴욕타임스>는 “아무리 실력이 뛰어난 연주자라도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라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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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서울 여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연주하고 있는 유자왕. ⓒmida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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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출중한 기교에 대해선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의 ‘튀는 패션’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평론가들조차 그가 선보이는 극강의 테크닉을 인정한다. 유자왕은 이번 첫 내한 리사이틀을 통해 한국 청중에게도 ‘최고 기량의 피아니스트’란 점을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이날 현장에서 연주를 지켜본 관객 이지연(55)씨는 “더 이상의 기교를 기대할 수 없을 것 같은 극강의 스킬을 보여줬다”며 “피아노의 음역대를 최대한 활용해 강약의 소리를 조율하는 능력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유자왕은 양팔을 넓게 벌려 피아노의 좌우 극저음과 극고음을 수시로 넘나들며 신들린 듯 연주했다.

하지만 유자왕이 기교만 뛰어난 연주자는 아니다. 마치 엔진이라도 달린 것처럼 건반 위를 질주하는 손가락들이 놀라울 정도로 선명한 음색을 빚어낸다. 슈베르트의 ‘마왕’에서 그의 빠른 연타는 맑고 정확했다. 현장에서 만난 피아니스트 조은아는 “유자왕의 연주에선 리듬이 살아있고, 선율이 춤춘다”며 “잘 알려지지 않은 곡들을 찾아내 유자왕에게 초연을 맡기면 어떨까란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유자왕에겐 어떤 곡이든 연주하게 하면 그 곡이 살아 꿈틀거리게 하는 신비한 능력이 있다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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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서울 여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연주하고 있는 유자왕. ⓒmida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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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장 분위기를 주도하며 자유자재로 이끌어가는 능력도 탁월했다. 이날 그가 선보인 앙코르는 무려 12곡이었다. 1부, 2부에 이은 3부 공연을 방불케 했다. 피아노 의자에 앉은 채 이리저리 태블릿피시를 활용해 즉석에서 앙코르곡을 고르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청중들은 멈추지 않는 유자왕의 앙코르 화답에 일제히 기립박수를 보냈다. 축제 같은 공연이었다.

유자왕은 ‘거장’과 ‘천재’가 즐비한 세계 클래식 공연계에서 섭외 1순위로 꼽히는 연주자다. 여기엔 그의 기교와 음악성 외에도 파격적 의상 등 ‘음악 외적 요소’가 한몫한다는 걸 부인하기 어렵다. 그의 공연을 일종의 독특한‘문화 현상’으로 평하는 전문가도 있다. “음악성과 패션, 위트와 섹스어필이 한데 묶인 ‘유자왕 패키지’가 지난 세기 마를렌 디트리히(1901~1992)의 영화들만큼이나 이제 21세기 문화의 일부가 되었다.” 유자왕에 대한 최근 <뉴욕타임스>의 평은 이제 그가 하나의 ‘문화 브랜드’로 소비되고 있음을 방증하는 예다. 마들렌 디트리히는 나치 정권에 협력하지 않고 미국으로 망명한 독일 출신 배우. 화려한 외모와 성별을 구별하지 않은 독특한 패션으로 수많은 화제를 낳았지만, 그는 자신의 철학을 굳건히 지키며 수많은 배우와 감독들의 숭배에 가까운 찬사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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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서울 여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연주하고 있는 유자왕. ⓒmida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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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유럽의 보수적 클래식 평론가들이 유독 유자왕의 패션을 자주 거론한다는 점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영국의 영향력 있는 음악평론가 노먼 레브레히트는 “신체를 초월하는 영혼의 증거”를 찾으라고 유자왕에게 ‘충고’한다. “운동과 메이크업이 기한을 연장해줄 수는 있어도 40대를 넘어서는 건 무리”라고도 했다. 그러면서 “일본 태생 피아니스트 미츠코 우치다(74)처럼 어깨를 덮는 헌 옷차림에 노동자 임금보다 저렴한 구두를 신은 유자왕이 카네기홀 무대로 걸어 나오는 모습을 상상해보자”고 한다. ‘꼰대의 헛소리’라고 치부할 수도 있지만 서구 보수적 음악계에선 이런 시선이 적지 않은 게 현실이다.

유자왕은 자신에 대한 이런 식의 서구식 시선에 별로 개의치 않는 것 같다. “음악이 아름답고 감각적이라면 왜 그에 맞춰 입으면 안 되는 거죠? 이건 권력과 신념에 대한 문제예요.” 영국 <옵저버>의 평론가 피오나 매독스에게 그는 이렇게 쏘아붙였다. 이날 서울 공연에서 유자왕은 1부와 2부의 의상을 달리했다. 아찔할 정도로 높은 하이힐을 신었지만, 페달 움직임은 기민하고 정확했다. 그런데 정작 그의 옷보다 더 눈에 띄는 건 건반을 누르기 위해 꿈틀거리는 두툼한 근육의 그의 팔뚝이었다. 흑백의 건반을 두드리는 그의 팔뚝은 쇠망치를 연타하는 건설노동자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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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9월, 조지 에네스쿠 국제 페스티벌에서 연주했던 유자왕. EPA/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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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 랑랑과 함께 중국의 양대 클래식 슈퍼스타로 꼽히는 유자왕은 아버지가 타악기 연주자, 어머지가 무용가다. 15살 때 미국 아스펜 음악제 콩쿠르에서 우승한 이후, 프로 연주자로 활동했다. 2007년 아르헨티나 출신 피아노 거장 마르타 아르헤리치의 ‘대타’로 투입돼 호평받으면서 본격적인 스타덤에 올랐다. 독일의 권위 있는 클래식 음반사 도이체 그라모폰과 전속계약을 맺어 음반 활동도 왕성하다.

유자왕은 2013년과 2019년에도 내한했지만, 오케스트라와 함께한 짧은 협연이 전부였다. 마침내 독주회로 한국을 찾은 유자왕은 21일 아트센터 인천 공연을 마지막으로 서울·대구·대전·고양 등 5개 지역 순회공연을 마무리한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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