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생 시민군’이었던 박재택씨가 지난 10일 전남 영암군 도포면 5·18 사적지 앞에서 1980년 5월 항쟁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 정대하 기자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군대처럼 ‘봉 체조와 피티(육체훈련체조) 훈련을 시켰어요. ‘고교생 삼청교육대’도 운영한 것 아닌지, 진상이 밝혀지길 바랍니다.”
지난 10일 전남 영암군 도포면 상리제(저수지) 앞에서 만난 박재택(62)씨는 “신북고 재학중에 5·18항쟁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문제 학생’으로 찍혀 이듬해 충남 아산의 충무교육원에 입소해야 했다”고 말했다. 1974년 개원한 충무교육원은 충남도교육청 소속으로 유신시절 학생들에 대한 충효사상 교육 등을 했던 곳이다.
1980년 5월 내란부화수행 혐의로 기소돼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은 박씨는 그해 12월29일 풀려났다. 이듬해 3월 2학년으로 복학한 그는 그해 5월 친구 3명과 함께 충무교육원에 입소해 훈련을 받았다. 박씨는 “교관들이 5·18 관련자라는 이유로 8박9일간 저녁마다 우리 넷만 따로 불러 곡괭이 자루로 폭행했다”고 말했다. 전두환 정권 시대에 5·18 시위 참여자들이 삼청교육대에 강제로 입소했다는 사실(<한겨레> 2021년 5월18일치 1면)이 확인된 적이 있지만, 고교생 순화 교육 관련 증언은 박씨가 처음이다. 충무교육원 쪽은 “그때 5월 25~29일 입소교육을 한 단체사진은 있는데, 교육 내용 자료는 남아있지 않다”고 밝혔다.
1980년 5월 전남 영암 신북고 재학
지역 청년들 함께 광주 시민군 도와
이듬해 복학…4명 충무교육원 ‘입소’
“5·18 관련자란 이유로 밤마다 폭행”
광주 밖 전남 대부분 지역에서 참여
“다음달 ‘영암 5·18 항쟁사’ 출간”
박재택씨가 1981년 5월 영암 신북고교 동기 3명과 함께 입소해 호된 교육과 폭행에 시달렸던 충무교육원의 수련기념 단체사진. 박재태씨 제공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박씨는 1980년 5월21일 오후 영암 신북터미널에 차량을 몰고 내려온 광주 시위대 중에 고향 친구들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시위대들은 “군의 발포와 과잉진압으로 광주 시민들이 죽어간다”며 동참을 호소했다. 박씨 등 고교생들과 전수용씨 등 지역 청년 15명은 5월22일 저녁 두 차례에 걸쳐 시종파출소 인근 뒷산에서 경찰들이 숨겨 놓은 소총 300여정을 찾아 차에 싣고 나주로 가 시위대에게 건넸다. 나주에서 광주 진출이 막힌 박씨 등 영암 청년들은 5월23일 오전 11시께 도포면 상리제 앞에서 예비군 중대장이 경운기에 몰래 싣고 가던 실탄 2만3천여발을 획득했다. 박씨는 “광주에서 왔거나 광주로 가는 시위대에 그 실탄을 나눠줬다”고 말했다.
전남 영암에서 5·18 때 지역 치안유지대 등과 함께 시위에 나섰던 고 김희규 화가. |
고 김희규 화가가 1980년 6월 상무대 영창에서 함께 고문당한 시민군들을 떠올리며 한 손으로 남긴 작품. 영암문화원 제공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박씨 등 청년들은 5월23일 오후 영암읍내로 진출했다가 김희규(1943~2019)씨와 김무씨 등이 꾸린 ‘지역 치안유지대’ 대원들을 만나 무장해제를 당했다. 김한남(74) 영암문화원장은 “지역 치안유지 대원들이 박씨 등 무장 청년들을 영암초등학교 운동장으로 유인해 차에 총을 두고 내리게 한 뒤 제압했다”고 말했다. 박씨 등 청년들은 순식간에 총을 뺏긴 뒤 경찰서에서 인적사항을 적어 두고 집으로 흩어졌다가 훗날 경찰에 연행됐다. 박씨는 “지역 치안 유지를 위해 무장해제를 시켰다고 하지만, 결과적으로 5·18 투쟁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신북면 출신 노경운씨는 친구 장갑동(62·경기도 거주)씨 등 10여명과 광주로 가서 5월22일 시민군 차량을 타고 이동하던 중 계엄군이 쏜 총에 맞고 숨졌다.
영암 주민들도 5·18에 적극 참여했다. 읍내 식당과 가게 주인과 영암여고생 등은 5월21일 김밥을 만들어 광주에서 온 시위대에게 건넸다. 고 김희규씨와 최철환씨 등은 유지들과 협의해 돈을 걷어 천과 페인트를 구입해 이강하 화가 등과 함께 ‘계엄령 해제하라’ 등의 구호를 적은 펼침막을 제작했다. 영암 주민 50여명은 차량 2대에 펼침막을 내걸고 광주로 향했다. 그런데 5·18 이후 무기회수 공로로 도지사 표창까지 받았던 김씨는 그해 6월 돌연 광주 상무대 영창으로 끌려갔다. 신군부는 홍익대 미대 출신인 김씨를 ‘영암 폭도 수괴’로 둔갑시키려고 혹독하게 고문했다. 김씨의 부인 한정희(74)씨는 “고문 후유증으로 오른손을 쓸 수 없었던 남편은 출소 두달 남짓만인 그해 12월 왼손 만으로 영창 안에서 고문을 받던 시민군들의 모습을 그려 기록했다”고 말했다.
1980년 5·18 때 광주에서 온 시위대 차량과 전남 해남 지역 주민들이 시위하는 모습 등이 찍힌 사진. 인근 영암 등 전남 지역 대부분의 시위 양상도 비슷했다고 주민들은 증언하고 있다. <해남신문> 제공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오월 항쟁에는 광주 만이 아니라 전남 지역 15~16개 시·군 주민들도 참여했다. 영암 지역에서는 5·18 기소자 37명, 훈방자 65명 등 102명이 연루자로 집계됐다. 5·18 전체 기소자 404명 중 광주 출신이 207명(51%)으로 가장 많고, 영암이 두번째를 기록했다. 이어 목포 34명, 화순 27명, 나주 23명, 해남 8명 등의 순이다. 하지만 ‘광주 밖의 5·18’에 대해선 역사적인 조명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박씨는 “전남 주민들도 함께 싸웠는데 5·18 기념행사 등은 광주 중심으로 이뤄져 아쉽다”고 말했다. 전남 지역에선 2020년 5월 <5·18과 나주사람들>이라는 구술집이 나왔을 뿐, 5·18 지역사 연구가 미흡한 실정이다.
5·18민주유공자 영암동지회장을 지낸 박씨는 “지난해 8월 9명이 참여해 편집위원회(위원장 김한남)를 꾸려 ‘영암 5·18 항쟁사’ 출간을 준비하고 있다. 다음달 책이 나온다”고 말했다. 고향 시종면에서 66만㎡(20만평) 규모의 고구마 농사를 짓는 박씨는 영암농민회장을 맡기도 했다.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벗 덕분에 쓴 기사입니다. 후원회원 ‘벗’ 되기
항상 시민과 함께 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 신청하기‘주식 후원’으로 벗이 되어주세요!
[ⓒ한겨레신문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