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민족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인 이육사는 해방을 1년 앞둔 1944년 1월 16일 베이징 감옥에서 순국했습니다.
'육사'는 호이며 본명이 원록 또는 원삼인 그는 1904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 조부에게서 한학을 배우고 대구에서 공부했습니다. 1925년에는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했고요.
이후 베이징으로 가서 베이징 사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1927년 귀국했으나 독립운동가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돼 대구형무소에서 3년간 옥고를 치렀습니다.
그때 수인번호 264를 따서 호를 '육사'라고 지었다고 합니다. 출옥 후 다시 베이징대학 사회학과에 입학, 수학 도중 중국 문학가 겸 사상가인 루쉰 등과 사귀면서 독립운동을 계속했습니다.
1933년 귀국해 '육사'란 이름으로 시 '황혼'을 발표해 등단했습니다. 이어 신문사·잡지사를 전전하면서 시작 외에 논문·시나리오까지 손을 댔고, 루쉰의 소설 '고향'을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1937년에는 신석초·윤곤강·김광균 등과 함께 동인지 '자오선'을 발간, 유명한 '청포도'를 비롯해 '교목', '절정', '광야' 등을 발표했습니다.
그는 시작활동 못지 않게 독립투쟁에 헌신해 전 생애를 통해 17회나 투옥됐습니다.
1943년 초봄 독립운동을 위해 다시 베이징으로 갔다가 귀국해 같은 해 6월 경찰에 체포돼 베이징으로 압송됐습니다. 이듬해 일제의 모진 고문 끝에 지하감옥에서 숨졌습니다.
이육사가 숨진 후 1년 뒤 일제강점기에서 해방됐죠. 그 후 1946년 신석초를 비롯한 문학인들이 유고시집 '육사시집'을 간행했습니다. 1968년 고향 안동에 육사시비가 세워졌고 같은해 건국훈장 애국장이 수여됐습니다.
그는 시에 독립의지와 항일투쟁에 관한 내용을 담았지만 이를 직설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언어적 정제를 통해 화려한 상징과 은유를 사용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끝까지 민족 양심을 지키며 죽음으로써 일제에 항거한 시인으로 목가적이면서도 웅혼한 필치로 민족 의지를 노래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광야]
유창엽 기자 김지효 크리에이터
yct9423@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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