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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2 (수)

‘퐁퐁다리’에 누워 별 보고, 텅 빈 들녘 거닐며 보았네··· 만물이 치유하고 회복하는 시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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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시골 폐교의 ‘책방지기’ 된

소설가 김탁환과 곡성 여행

1996년 첫 장편을 발표한 이후 23년간 골방에 틀어박혀 이야기를 짓던 도시 소설가는 딱 일년만 쉬기로 마음먹는다. 숨이 턱밑까지 차올라 ‘여기서 멈추지 않으면 죽겠구나’ 싶었던 2019년 어느 날이었다. 장편만 내리 스물아홉 편을 펴낸 작가지만 그날 이후 단 한 글자도 쓰지 않고 그저 길 위를 걷기로 했다. 글 밖 세상으로 나와 일년 동안 쉰 곳 넘는 마을을 돌아다녔다.

가장 많이 발걸음한 곳이 전남 곡성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곡성행 KTX에 몸을 실었다. 하루, 이틀 머무는 날이 늘어나자 올 초 아예 곡성에 아담한 집필실을 마련했다. 페이스북엔 언제부턴가 농사짓는 이야기가 등장하더니 올겨울 ‘생태’를 테마로 한 작은 책방을 연다는 소식을 전했다. 일주일에 사흘은 서울에서, 나흘은 곡성에서 ‘삼도사촌(三都四村)’ 한다는 ‘불멸의 이순신’ 작가 김탁환을 만났다. 메타버스(현실 세계를 초월한 가상의 디지털 공간)를 논하는 세상에서 농촌으로 들어간 그의 이야기가 미치도록 궁금했다.

◇도시 소설가의 소우주, ‘미실란’

한동안 항간에는 소설가 김탁환이 글은 안 쓰고 곡성에서 농사를 짓는다는 소문이 돌았다. 전혀 틀린 말은 아니었다. 작가는 올 한 해 거의 매주 3~4일 곡성에 머물면서 반나절은 집필실에서 20~30장 분량의 글을 쓰고, 남은 시간엔 농사를 짓거나 들녘을 걸었다. 어설픈 귀농 흉내 내기는 아니었다. ‘농업 전문가’에게 파종부터 모내기, 벼 베는 법까지 배우며 전 과정에 손을 보탰다. 작가는 “농번기였던 지난 5~6월엔 아예 글을 쓰지 못했더니 출판 편집자들이 걱정 섞인 말투로 ‘곡성에서 농사만 짓는 것 아니냐?’고 묻더라”며 웃었다. 추수가 끝난 텅 빈 들녘을 그는 몹시 흡족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제 노동력을 보태 만든 풍경입니다. 참 아름답지요? 저는 이곳에서 두 번째 인생 발아(發芽)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경남 진해 출신 소설가를 강한 자성으로 끌어당긴 곳은 곡성읍에 있는 미실란(美實蘭)이다. 작가는 “첫 만남부터 이름에 끌렸다”고 했다. “지인의 소개로 농업회사법인 ‘미실란’이란 곳에서 운영하는 채식 식당 ‘밥café 飯하다(밥 카페 반하다)’에서 식사를 하게 됐어요. 미실란은 1998년 졸업생을 끝으로 폐교된 곡성동초등학교에 자리 잡은 발아 현미 연구·곡물 가공 전문 업체인데 쌀 미(米)자가 아닌 아름다울 미(美)자를 쓰는 게 제겐 특이하게 느껴졌죠. 그날 서울로 돌아오던 KTX 안에서 ‘미실(美實)’이란 두 글자를 손에 쥔 호두알처럼 굴렸습니다.”

‘도시 소설가’ 김탁환과 ‘농사짓는 과학자’ 이동현 미실란 대표가 만난 이야기는 웬만한 연애소설보다 재미있다. 이 대표는 일본 규슈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미생물 연구자이자 오직 친환경 농법으로만 벼농사를 짓는 농부. 2006년 당시 곡성군수의 제안으로 방치된 초등학교에 미실란을 설립하고 발아 현미를 연구, 생산해오며 계절에 따라 생태 체험 프로그램이나 ‘들녘 음악회’ 등도 열어오고 있다. 이름에 대한 궁금증은 계기가 되었을 뿐, 서로 닮은 듯 다른 삶을 살아온 두 사람은 틈만 나면 만났다. 거창한 일을 도모하기보다는 논과 밭, 들을 거닐거나 함께 농사지으며 자연, 생태, 공동체 그리고 가족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서로의 고민과 꿈 이야기까지 진솔하게 나눴다. 마치 도시에서 전학 온 친구와 온 마음 다해 친해지고 싶다고 표현하는 시골 친구 사이처럼. “나중에 알고 보니 미실란은 ‘아름다운 사람들이 희망의 열매를 꽃피우는 곳’이라는 뜻을 담았다고 하더군요.”

◇‘달문의 마음’ 그리고 ‘들녘의 마음’

김탁환이 작년 8월에 펴낸 에세이 ‘아름다움은 지키는 것이다’(해냄)는 두 사람이 만나고 두 번째 인생 발아의 시간을 함께 보내며 발견한 삶의 지혜와 회생의 길을 담아낸 책이다. 교집합이 될 만한 거라곤 하나도 없는 ‘아재’들이 만나 ‘오십춘기’ 성장통을 겪으며 발견한 진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그것들을 지켜내는 방법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들어있다. 두 사람은 책 출간 이후 함께 강연도 다니고, 북 콘서트도 열며 더 많은 시간을 ‘동행’하는 중이다.

작가의 집필실도 폐교 건물 2층에 자리 잡았다. 한때 벼 창고로 쓰던 공간으로 작가가 2018년 발표했던 장편 ‘이토록 고고한 연예’의 주인공 달문의 이름을 따 ‘달문의 마음’이란 문패를 달았다. 햇볕 잘 드는 창가에 서면 운동장과 들녘이 훤히 내다보인다. 오는 18일엔 미실란 1층에 들녘의 마음이라는 이름의 생태 책방도 연다. 현재 시범 운영 중인 책방에서는 김탁환이 엄선하고 서평을 단 자연, 생태 관련 400여 권의 책을 만날 수 있다. 이동현 대표는 “작가를 만나기 위해 일부러 책방을 찾는 여행객이 많아졌다”며 “김탁환 작가가 미실란에 부족했던 감성을 채우는 역할을 톡톡히 해주고 있다”고 말했다.

◇‘퐁퐁다리’와 섬진강의 무릉도원

이 대표는 작가에게 곡성의 아름다움에 대해 눈뜨게 해줬다. 그는 폐교 복도의 마룻바닥도, 모내기를 끝낸 논에서 만난 왕우렁이도 “아름답다”고 표현했다. 두 사람이 아름다움과 마주하기 위해 찾았던 곳은 미실란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침실습지퐁퐁다리다. 이 대표가 “뽕뽕다리”라고 표현한 퐁퐁다리는 침실습지에 있는 철제 다리의 공식 이름. 다리 바닥에 작은 구멍이 뚫려 있어 섬진강 물이 다리 밑까지 차오르면 구멍 사이로 강물이 ‘퐁퐁’ 솟아난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란다. 주 기능은 읍내를 오가는 지름길. 곡성을 관통하는 섬진강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만날 수 있는 다리이기도 하다. 작가는 이 대표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자신에게 권했던 것처럼 “이 다리는 직접 누워봐야 진정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며 별안간 다리에 두 다리를 쭉 뻗고 누웠다. 작가처럼 물 흐르는 방향으로 머리를 대고 퐁퐁다리에 누웠더니 구멍 사이로 물소리가 유난히 또렷하게 들렸다. 서늘한 쇠의 냉기가 느껴졌지만 묘하게도 머릿속 시름들이 흐르는 물에 씻겨 내려간 듯 마음이 평온해졌다. 작가는 “이렇게 누워 밤하늘의 별을 봤는데 물소리에 스미면서 별빛에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고 했다.

퐁퐁다리를 에워싼 침실습지는 곡성 9경 중 3경에 속하는 곳으로 섬진강과 곡성 시내에서 흘러든 곡성천, 고달천, 오곡천 등이 만나는 길목에 형성된 하천 습지다. ‘섬진강의 무릉도원’이라고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경관을 간직하고 있다. 22번째 국가 습지로 지정된 습지 곳곳엔 수달, 흰꼬리수리, 삵, 남생이 등 멸종 위기 동식물이 깃들어 살고 있다. 해 질 녘 침실습지 주변에선 원앙, 왜가리 등이 목격된다. 일교차가 큰 4~5월과 9~11월 봄·가을 새벽녘에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풍광으로 유명하다. 기온이 영하 8℃로 떨어지면 상고대도 관찰할 수 있다. “하지만 모두 날씨 운이 좋아야만 볼 수 있다”고 이 대표는 말했다. 이 시기엔 일몰 때가 가장 운치 있다. 겨울로 접어들며 앙상해진 나뭇가지와 휑한 들판을 보곤 “조금 쓸쓸해 보인다” 하니 이 대표가 말했다. “겨울은 만물이 치유하고 회복하는 시간이에요. 모든 게 소멸되는 듯하지만, 조용히 다음 계절을 준비하는 풍경이라 생각하면 아름답게 보인답니다.”

침실습지와 미실란 사이엔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섬진강기차마을이 있다. 메타세쿼이아 나무가 600m 정도 길게 늘어선 가로수길은 곡성 읍내에 ‘베이스캠프’를 둔 작가가 미실란의 집필실로 출퇴근할 때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지나는 길이다. 이 길을 지나면 나오는 섬진강기차마을은 고달면 ‘섬진강도깨비마을’과 함께 곡성 관광 명소 중 하나다. 1933년 영업을 시작해 1999년까지 전라선 열차가 오갔던 옛 곡성역 역사(驛舍) 일대를 기차 테마 마을로 꾸민 곳이다. 섬진강변을 시속 30㎞로 달리는 증기기관차 등 즐길거리가 많은 레트로 여행지. 요즘 같은 계절에 찾는다면 대관람차 너머 눈이 시릴 정도로 서정적인 일몰 풍경과 조우할지도 모른다.

◇태안사 흙길 걷고, 제월섬서 ‘숲 멍’

퐁퐁다리와 침실습지가 ‘물 멍(물소리 들으며 멍하게 있는 것)’하기 좋은 곳이라면 미실란에서 차로 20분 거리 죽곡면 태안사는 ‘숲 멍’ 하기 좋은 곳이다. 작가는 “태안사의 누각인 능파각도 좋지만 태안사를 오르내리는 흙길이 참 좋다”고 했다. 초입에서 태안사에 이르는 길은 비포장 등산로에 가깝다. 편도 30분 남짓 소요된다. 해가 빨리 지는 것을 고려해 겨울엔 낮 시간대에 서둘러 방문하는 게 안전하다. 태안사 초입 부근엔 조태일 시문학기념관도 있다.

미실란에서 차로 10여분 거리에 있는 입면 함허정도 지나치면 아쉬운 곳이다. 조선 중종 38년(1543년) 심광형이 이 지역 유림들과 풍류를 즐기기 위해 지은 정자로 조선 시대 땐 호남 4대 정자 중 하나로 꼽힐 정도로 건축미가 뛰어나며 주변 풍광도 수려하다. 함허정에 서면 가까이 제월섬이 한눈에 펼쳐진다. 한때 방치돼 ‘똥섬’이라 불리기도 했다던 제월섬은 숲 놀이터로 변신했다. 평일에 찾는다면 메타세쿼이아 군락지 등 섬 전체를 전세 낸 듯 ‘황제 산책’을 즐길 수 있다.

다시 미실란으로 돌아왔을 땐 어둠이 내렸다. 작가는 곡성에서 지낸 이야기를 묶어 내년 봄 에세이집을, 2023년에는 섬진강에 기대어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장편을 펴낼 예정이라고 했다. 작별 인사를 하기 전 책방 ‘들녘의 마음’에 들러 작가가 추천한 책을 사서 내밀었더니 이렇게 적어 주었다. ‘함께, 아름다움을 지킵시다.’ 다시 도시로 향하는 발걸음을 향해 푸른 밤하늘 아래 너른 들녘이 바다만큼 큰 위로를 건넸다.

[ ‘도시 소설가’ 감동시킨 채식 밥상, 뜨끈한 다슬기 수제비 한 그릇 ]

소문난 곡성 맛집

곡성읍 농업회사법인 ‘미실란’에서 운영하는 밥café 飯하다(밥카페 반하다)는 채식을 하는 작가 김탁환이 첫눈에 ‘반한’ 식당. 들녘을 내다보면서 제철 채소로 만든 반찬에 발아 현미로 지은 밥을 먹을 수 있는 곳이다. 김 작가의 조언에 따라 ‘완전 채식’ 메뉴로만 구성한 ‘오색 발아 현미 낭만 세트(2인 이상, 1인 1만5000원)’는 토란흑미쌀수프로 시작해 친환경 누룽지·미숫가루·고흥 유자를 넣어 만든 샐러드, 삼색궁중떡볶이, 흑미두부지짐, 오색발아현미밥, 토란국, 친환경 쌈채소가 정갈하게 나온다. “완전 채식을 지향해 김치도 젓갈을 넣지 않고 과일로 맛을 내고 있다”는 게 직원의 설명이다. 낭만 세트에 곡성토란표고탕수(2~3인 1만5000원)를 곁들여 먹는 이들이 많다. 단품 메뉴로 곡성토란영양덮밥(1만2000원), 곡성멜론돈가스(1만2000원)도 선보인다.

함허정과 제월섬에서 미실란으로 가는 청계동로 곡성읍 순자강 민물매운탕은 현지인들 사이에서 민물매운탕 맛집으로 통한다. 따끈한 다슬기 수제비 한 그릇(9000원)을 하기 위해 찾는 이들도 꾸준하다. 호박, 감자 등을 썰어 넣은 맑은 수제비에 다슬기를 넣어 국물 맛이 깔끔하다. 다슬기 수제비를 주문하면, 8~9가지 반찬과 함께 커다란 그릇에 비빔밥이 서비스로 나온다. 주인은 “국내산 다슬기만 고집한다”고 했다. 부근에 있는 청계참다슬기는 다슬기 요리를 전문으로 하는 집. 이 집 다슬기 수제비(1만원)는 다슬기가 듬뿍 들어가 국물이 짙은 초록색을 띠는 것이 특징이다. 섬진강을 내다보며 다슬기 닭백숙(6만8000원), 다슬기 전(1만5000원) 등을 골고루 맛볼 수 있다.

곡성 석곡면은 호남고속도로 개통 전까지 한때 여수, 순천을 오가는 사람들 사이에선 흑돼지로 유명했던 곳이다. 석곡면 석곡식당은 3대를 이어온 흑돼지 맛집으로 유명하다. 흑돼지 석쇠불고기는 양념과 간장 맛 중 선택할 수 있다. 숯불 향 나는 석쇠불고기는 양이 약간 아쉽지만, 맛은 아쉽지 않다는 반응이 우세하다.

[곡성=박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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