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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불신이 만드는 ‘글로벌 트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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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미국 국가정보위원회의 ‘글로벌 트렌드 2040’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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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곽노필

콘텐츠기획팀 선임기자

20세기 후반 이후 붐을 이룬 메가트렌드 분석서 중 가장 체계적인 것이라면 아마도 미국 국가정보위원회(NIC)가 펴내는 ‘글로벌 트렌드’ 시리즈를 꼽을 수 있다. 새 미국 대통령 취임에 맞춰 4년마다 나오는 보고서다. 저마다 정보력을 자랑하는 기관들이 참여해 향후 20년 동안 미국의 세계 전략에 영향을 미칠 흐름을 분석한다. 미국 정책결정권자의 참고 자료이니만큼 그때마다 주목을 받는다. 조 바이든 대통령 취임을 맞아 작성한 ‘글로벌 트렌드 2040’ 보고서가 공개됐다.

7번째로 나온 이번 보고서의 주제는 ‘더 경쟁하는 세계’다. 서로 이기기 위한 다툼이 더 거세진다는 뜻이다. 주제를 이렇게 정한 이유가 뭘까? 궁금증은 ‘사회, 국가, 국제관계의 역학’을 분석하는 장에서 풀린다. 정보분석가들은 경쟁의 뒤에서 불신이라는 그림자를 봤다. 그 중심엔 정부와 지도층에 대한 실망감이 있다. 시민들에게 정부는 중재자나 공정한 판관이 아니라 기득권층의 대변인이다. 그래서 급변하는 세상에서 자신을 도와줄 능력도 의지도 없다고 생각한다. 커지는 불평등, 나아지지 않는 경제 상황 등이 이런 생각의 불쏘시개다.

불신의 그림자 안에서 사람들이 찾아낸 자구책은 관심사나 생각이 비슷한 사람, 자신이 잘 아는 사람과 어울리는 것이다. 그들을 찾아가 위안과 힘을 얻는다. 소셜미디어는 이들의 놀이터로 안성맞춤이다. 갖가지 정체성을 내건 그룹들이 소셜미디어에 터를 잡고 사회적, 정치적 영향력 확대를 노린다. 디지털과 세계화 덕에 국경을 넘어 지지층을 모을 수도 있다. 우군의 존재를 확인한 사람들은 자기 생각에 더 확신을 갖게 되고, 그룹들의 배타성은 더 짙어진다. 접촉 세계를 확장해주는 도구가 오히려 꽉 막힌 세계관을 만들어내는 꼴이다.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저신뢰 사회의 특성이라고 본 가족주의 또는 연고주의의 디지털판 변형이라고 할까.

끼리끼리 문화는 공동체를 더 분열시키고 갈등을 키운다. 타협하고 절충해야 할 것들은 늘어나는데 그런 동력은 사그라지고, 사회 응집력은 와해된다. 정체성을 무기로 한 증오와 공격이 난무하고, 신념이 진실을 잠식한다. 서로 대립하는 가치가 충돌하지만 믿을 만한 조정자가 없으니 승자와 패자의 간극이 커진다. 진짜 같은 가짜를 만드는 디지털 기술은 사태를 진정시키는 게 아니라 악화시킨다. 이미 우리는 코로나19 사태 속에서 가짜 정보가 일으키는 인포데믹(정보전염병)을 경험하고 있다. 국가 운영은 더 힘들어지고, 국가 간 갈등의 골은 깊어진다.

보고서가 펼쳐 보인 불신의 연쇄고리가 사뭇 섬뜩하다. 실제로 각종 여론조사에 드러난 사회적 신뢰 지수는 대다수 나라에서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물론 다양한 정체성 집단의 등장을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세계 경찰국가의 시각에서는 불안 요소로 비치겠지만, 그동안 억눌리고 인정받지 못했던 가치들이 제 목소리를 내는 측면도 있다. 블록체인, 암호화폐에서 보듯 기존 규범에 대한 불신은 새로운 규범을 싹틔우기도 한다. 트럼프 집권 4년 동안 국제사회를 혼돈에 빠뜨린 미국의 책임을 떠넘기고 싶은 심리도 보고서 작성에 작용했을 법하다.

요체는 사람이 개입된 문제를 해결하려면 사람 간 협력이 필수라는 점이다. 기후변화 같은 거대한 위기에는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러나 불신의 토양에선 협력이 자라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보고서는 사태의 핵심을 잘 간파했다. 불신의 사슬을 끊어야 건강한 미래 담론의 장이 설 수 있다. 신뢰의 물꼬를 트는 일차적 책임은 공적 부문의 지도층과 기관에 있다. 그런데 불신의 장벽을 높이는 일들만 벌어지고 있으니, 미래가 움터 자라기는커녕 뿌리마저 상해버리는 건 아닌지 우려스럽다.

nop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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