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의 마녀들
김태우 지음|창비|372쪽|2만4000원
국제민주여성연맹 한국전쟁 조사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던 모니카 펠턴, 이다 바크만, 카테 플레론, 마리야 드미트리예브나 옵샨니코바, 제르멘 안네바르, 에바 프리스터(왼쪽부터). 창비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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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호텔방에 모인 여성들이 머리를 맞대고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있다. 부모님에게, 친구에게, 남편에게 남기는 유서다. 1951년 5월15일, 한국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때다. 다음날이면 이 여성들은 전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인 북한으로 들어간다. 언제 어디서 포탄을 맞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곳이기에 마지막 말을 남기는 것이다. 이들은 군인이 아니다. 덴마크, 체코슬로바키아, 네덜란드, 영국 등 18개국에서 모인 총 21명의 여성들이다. 대부분이 변호사, 정치가, 도서관장, 대학교수, 잡지 편집장 등 내로라하는 직업을 가진 ‘인텔리’다. ‘잃을 것 많은’ 여성들이 북한으로 향하는 이유는 전쟁터에서 벌어지는 폭력과 학살의 참상을 직접 보고 기록해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여성들은 국제민주여성연맹(이하 국제여맹)의 한국전쟁 조사위원회 위원들이다.
<냉전의 마녀들>은 한국전쟁 당시 국제여맹이 10여일 동안 신의주, 평양, 황해도, 평안남도 등의 지역을 돌아다니며 목격한 민간인 대상 공중폭격, 집단 고문, 성폭력 등의 참상을 담은 책이다.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 ‘전쟁’과 ‘파시즘’이 여성과 아이들의 일상을 얼마나 철저하게 파괴할 수 있는지 생생하게 체험”했던 당대 여성들은 ‘평화’와 ‘반파시즘’을 기치로 모여 국제여맹을 결성했다. 1945년 11월 창립된 이 조직은 당시 가장 크고 영향력 있는 국제여성단체였다. 창립 5년 후 국제여맹은 북한 여성들의 고통에도 응답했다. 1951년 1월 북한의 ‘조선민주여성동맹’은 미군의 가혹한 전쟁수행 방식과 피폐해진 일상을 고발하는 장문의 호소문 ‘전 세계 녀성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발표했다. 호소문이 결정적 계기가 돼 국제여맹 내에서 조사위원회가 꾸려진 것으로 보인다. 위원회는 북한 지역 조사 뒤 ‘우리는 고발한다’라는 제목의 조사보고서를 7개국 언어로 동시 발간해 북한 여성들의 고통을 공유했다.
보고서는 물론 조사위원회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조차 많지 않다. 민간인 무차별 폭격 등 미군에 비판적인 내용이 담겼던 탓이다. 조사위원회의 행동은 발표 직후 매카시즘의 광풍을 맞고 소련의 선전 팸플릿으로 폄하돼 수장됐다. 2010년 이후부터야 해외 여성학계를 중심으로 이들의 활동에 대한 연구가 조금씩 등장하기 시작했다.
<냉전의 마녀들>을 쓴 역사학자 김태우 한국외대 한국학과 교수는 조사위원회의 보고서와 미 공군의 기록, 조사위원들이 본국에 돌아가 남긴 개인 기록·언론 활동들을 치밀하게 파헤쳤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보고서 내용을 처음 접한 저자도 이를 “소련이나 북한 측의 정치선전물로 쉽게 단정”했었다고 한다. 하나 미군이 1950년 11월을 기점으로 북한 도시와 농촌의 인구밀집지역을 핵심 타깃으로 설정한 이른바 ‘초토화 정책’을 폈다는 연구들을 속속 접하면서 국제여맹 활동에 다시 주목했다. 저자는 한국전쟁 관련 다른 기록과 위원회의 기록을 교차검증하고 보고서 주장 중 상당 부분이 신뢰할 만하다고 판단해 이를 한 권의 책으로 써내기에 이르렀다.
<냉전의 마녀들>은 기록 복원물이나, 한 편의 전쟁소설과 같이 인물의 서사를 군데군데 섞는 방식으로 쓰였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영국 조사위원인 모니카 펠턴이 있다. 펠턴은 위원회 파견 당시 영국 최초의 뉴타운 건설을 위한 스티버니지 개발공사의 총재직을 맡고 있었다. 그는 “도시계획 분야에서 ‘남자들 사이의 거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최고의 전문직 엘리트”였다. 스티버니지 개발계획 추진으로 매우 바쁜 일정 속에서도 위원회의 북한행에 합류한다.
펠턴이 이야기 중심에 놓인 것은 그가 남긴 개인기록이 풍부해서이기도 하지만, 친미나 친소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위원회 성격을 잘 드러내는 인물이라서다. 펠턴이 북한으로 떠난 가장 큰 목적은 애국심이었다. 당시 영국 내에서는 한국전쟁으로 인해 국방비 증액을 둘러싸고 논쟁이 있었는데, 국방비 증액은 복지예산 삭감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펠턴은 갈등의 배경이 된 한국전쟁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어했다. 그는 북한행 목적에 대해 “그 유일한 목표는 진실을 발견하는 것이었고, 진실을 발견할 경우 그것을 세상에 알리는 것이었다”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위원회에는 소련 대표인 마리야 드미트리예브나 옵샨니코바 같은 위원도 있었지만, ‘친미적’이거나 보수로 평가받을 만한 인물이 여럿 속해 있었다. 덴마크 출생 이다 바크만은 미국으로 망명해 미 전쟁정보국 덴마크부 최고지휘관을 지낸 “완연한 친미주의자이자 자유주의자”였다. 덴마크 조사위원인 카테 플레론은 덴마크 평화아카데미에 의해 ‘보수’로 분류되는 정치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위원들은 모두가 모인 첫 날부터 설전을 거듭하며 위원회가 공산주의 혹은 반공산주의처럼 보이는 것을 경계하고 균형을 유지하려 했다.
각자가 속한 국가와 서 있는 자리는 달랐지만, 조사위원들이 보고 증언한 북한의 참상은 일관됐다. 1950년 11월 유엔군의 초토화정책 이후 전쟁 초기 사용이 금지됐던 소이탄을 시가지에 폭격해 초등학교·시립병원·거주지가 파괴된다. 조사위원들이 만난 많은 사람들이 폭격 후 항공기가 저공비행을 하며 ‘기총소사’로 난사해 가족들을 잃었다고 증언한다. 펠턴은 “예전에 20만명이 거주하던 도시를 지나갈 때조차 내가 본 것은 오로지 수천개의 굴뚝뿐이었다”고 회상했다. 저자는 미군 외에 또 다른 학살의 주체였던 한반도 내 ‘우익치안대’와 관련해서는 현지 통역담당들이 조사위원에게 통역하는 과정에서 고의적으로 누락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한계점도 언급한다. 하지만 조사위원들이 미군에 의한 민간인 피해 현장을 목격한 것만은 분명하다고 강조한다.
여성의 눈은 숫자로 카운팅되는 피해 규모보다 전시에 여성이 겪는 끔찍한 폭력을 응시했다. 4개로 나눠졌던 조사조 중에서 강원 지역 조의 조사보고서는 전체 분량의 4분의 1 이상을 성폭력 관련 내용에 집중적으로 할애했다. 집단강간, 강간 후 살해 기록이 메스꺼울 정도로 이어진다. 미군이 거리에서 여성들을 마구 잡아들인 후 한 장소에 모아놓고 ‘군인유곽’으로 활용했다는 증언도 나온다. 몇몇 북한 여성들은 이들이 외국에서 나온 여성 조사위원들이라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다짜고짜 울음부터 터뜨렸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펠턴은 인터뷰하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눈물을 흘렸다는 사실을 감추지 않고 기록한다. 저자는 “면담자가 같은 여성이라는 사실, 그리고 어쩌면 북한의 일상과 동떨어진 낯선 외국인 여성이라는 사실이 오히려 피해자들의 발화를 수월하게 만들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국제민주여성연맹 한국전쟁 조사위원회는 북한 주민들을 직접 만나 미군의 민간인 대상 폭격과 전시 성폭력 실태를 조사했다. 보안상 이유로 중국 인민복 복장을 하고 신의주 문화회관에서 신의주 시내를 내려다보는 조사위원들 모습(왼쪽 사진)과 북한 내 작은 마을에서 회의를 하는 조사위원들. 창비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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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을 걸었던 조사활동의 결말은 결코 아름답지 못하다. 본국으로 돌아간 여성들은 ‘마녀사냥’과 같은 고초를 겪는다. 펠턴은 스티버니지 개발공사 총재 직위에서 해임되고, 국가 배신 혐의로 재판정에 설 위기를 겪는다. 결국 인도 남부의 항구도시 마드라스로 망명해 쓸쓸하게 생을 마감한다. 쿠바 조사위원인 칸델라리아 로드리게스는 한국에서 보고 들은 것을 계속 대중에게 알리고 다녔다는 이유로 여러 차례 강제 이송과 투옥을 당한다. 서독 조사위원 릴리 베히터는 본국에 돌아와 위원회 활동 당시 목격한 전시 성폭력에 관해 연설을 하다가 체포되기도 했다.
매카시즘이라는 광풍이 작용하기도 했으나, 친소·친미·공산주의·반공산주의 등 어느 카테고리로도 해석되지 않는 국제여맹의 활동은 당대 사람들에게 필요 이상으로 배척받았다. “국제여맹의 대표적 캐치프레이즈인 반파시즘, 반식민주의, 반인종주의 등은 과거 여성운동사에서는 꽤나 생소한 내용들”이었다. “국제여맹이 북한을 방문했던 1951년은 두말할 나위 없이 권위주의적 남성주의가 여성의 일상을 압도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조사위원들은 자신이 살던 곳을 떠나 망명할 정도로 심한 박해를 받았음에도 단 한 명도 위원회 최종보고서의 내용을 부정하는 발언을 하지 않았다. 폭력과 살육이 난무하던 그 시기 반파시즘과 평화, 여성의 연대를 굳건히 지켜내려 하던 그들은 신념을 굽히느니 ‘마녀들’로 남는 길을 택한 것이다.
이혜인 기자 hye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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