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그룹 창업주인 이병철 회장(왼쪽)이 1980년 서울 태평로 삼성 본관 집무실에서 당시 이건희 부회장과 함께 서예 연습을 하며 다정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사진 제공 = 삼성전자] |
"앞으로 삼성은 건희가 이끌어가도록 하겠다."
고(故)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이 자신의 후계자로 3남인 이건희 회장을 지목한 것은 1976년 9월이었다. 당시 이병철 회장은 암 수술을 위해 일본으로 출국하기 하루 전 가족회의를 소집해 이같이 밝혔다. 이병철 회장의 장남 고 이맹희 전 CJ그룹 명예회장(2015년 별세)이 1993년 펴낸 자서전 '이맹희 회상록, 묻어둔 이야기'에 나오는 얘기다. 이병철 회장이 후계 구도를 언급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이병철 회장은 이후 11년을 더 살았지만 후계 구도에 대한 결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이병철 회장은 고 박두을 여사와의 사이에 3남 5녀를 뒀다. 아들로는 장남 이맹희 전 명예회장과 3남 이건희 회장 사이에 1991년 타계한 고 이창희 새한그룹 회장이 있다. 왜 이병철 회장은 일찌감치 위의 두 형을 제쳐두고 막내아들에게 그룹을 물려줄 생각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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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력한 설 가운데 하나는 이맹희 전 명예회장과 이창희 회장이 이병철 회장을 고발한 사건이 원인이라는 관측이다. 1966년 삼성그룹은 일본에서 사카린 원료 등을 밀수하다 적발됐다. 이병철 회장은 이를 계기로 사임하며 비료공장을 국가에 헌납했고 이창희 회장이 법적 책임을 지며 구속됐다. 이후 1969년 이병철 회장과 삼성그룹의 비리를 고발하며 처벌을 요청하는 탄원서가 청와대에 제출됐다. 이병철 회장은 이맹희 전 명예회장을 의심했고, 이맹희 전 명예회장이 삼성그룹 직책을 대부분 포기하도록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일화를 고려하더라도 장자 승계 전통이 뿌리 깊은 유교 문화권에서 3남의 승계는 파격이다. 이미 장남을 중심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조직 질서와 주변의 기대를 뒤흔드는 일이기 때문에 물려주는 사람의 '확신'이 웬만큼 강하지 않고는 어렵다. 이병철에서 이건희로 이어지는 경영권 승계는 조선 태종이 3남 충녕대군에게 보위를 물려준 사건에 종종 비교된다.
이병철 회장과 태종은 둘 다 '창업세대'라는 공통점이 있다. 창업세대는 자신이 이룬 기업 또는 국가를 보다 든든한 반석 위에 올려놓을 후계자를 절실히 갈구한다. 이병철 회장이 거대 기업을 이끌어갈 후보로 외향적·충동적인 장남보다 안정감 있는 3남을 택했다는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이병철 회장이 이건희 회장을 총애한 이유와 관련해서는 이런저런 일화들이 전해진다. 작고한 박준규 전 국회의장은 이병철 회장에게는 처조카가 되는 인물인데, 그는 2002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동기동창 보증 서주다가 돈을 떼이기도 했던 맹희 씨와 달리 이건희 회장은 매우 신중하고 치밀한 성격이다. 앞에 나서기보다는 한발 뒤에 물러서서 대국을 본다. 3형제 중 아버지를 가장 많이 닮은 사람이 이건희 회장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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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용 부회장 리더십에서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DNA가 묻어난다. 이건희 회장이 부회장이던 시절 이병철 회장은 '경청'이라는 휘호를 직접 써서 아들에게 건넸다. 리더의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태도'를 강조한 것이다.
이병철 회장은 또한 응접실에 나무로 깎아 만든 '목계(木鷄)' 조각품을 놓고 늘 경계했다고 전해진다. 상대의 도발에도 동요하지 않고 평정을 유지하는 상태를 상징하는 목계를 통해 어떤 일이 있어도 평정심을 잃지 말라는 교훈을 건넨 것이다. 이 같은 '경청과 목계'의 가르침은 이건희 회장을 거쳐 이 부회장에게 이르기까지 3대째 이어지고 있다. 시대 흐름에 맞춘 삼성 변신의 밑거름이기도 하다.
[노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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