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 동계올림픽·레슬링·탁구·빙상….'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을 생각하면 연상되는 스포츠 관련 단어들이다. 이 회장은 재계뿐 아니라 한국 스포츠계에서도 '거목'이었다. 특히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에는 고인의 노력과 인맥이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2009년 초부터 평창 올림픽 유치에 나선 이 회장은 1년 반 동안 170여 일간 해외 출장을 다니며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들을 만났다. 그는 2011년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 IOC 총회 직전까지 IOC 위원들을 만나 '왜 평창이 동계올림픽을 유치해야 하는지' 등을 설명했다. 저녁 약속을 했던 IOC 위원이 약속을 취소하겠다고 했을 때는 1시간30분을 기다려 만나기도 했다. 또 IOC 위원과 식사 자리에는 항상 당사자의 이름이 새겨진 냅킨을 테이블에 비치했다.
이 기간 이 회장이 전 세계를 누빈 거리는 지구 다섯 바퀴가 넘는다. 더반에서 올림픽 유치가 확정된 순간 이 회장은 눈시울을 적신 채 묵묵히 서 있었다. 당시 이 회장은 "이건 대한민국 국민 여러분이 만든 것이다. 저는 조그만 부분만 담당했을 뿐이다"며 올림픽 유치의 공을 국민에게 돌렸다.
이 회장은 1996~2017년 IOC 위원을 역임했으며, 이를 통해 국제 스포츠계에서 인맥과 영향력을 넓힌 게 동계올림픽 유치에도 도움이 됐다. 아울러 그는 IOC 위원으로서 스포츠를 국제 교류와 세계 평화에 기여하는 중요한 촉매제로 인식했다. 삼성전자는 1997년부터 올림픽 무선통신 분야 공식 스폰서로 활동하며 세계 스포츠 발전에 힘을 보탰다. 김진선 전 평창 올림픽 조직위원장은 "이 회장의 열성적 지원 덕분에 아시아와 중남미, 아프리카 지역 등의 부동표가 상당 부분 한국 쪽으로 흡수됐고, 그것이 올림픽 유치 성공의 결정적 계기가 됐다"고 전했다.
동계올림픽 유치의 또 다른 원동력은 이 회장의 '빙상 사랑'이다. 이 회장은 1997년 박성인 당시 삼성스포츠단 단장에게 "여름 스포츠의 기본은 육상이고, 겨울 스포츠의 기본은 빙상이다. 앞으로 동계올림픽을 유치하려면 반드시 빙상 종목을 육성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박 단장은 1997년 8월 대한빙상경기연맹 회장에 취임했다. 이 회장의 사위인 김재열 삼성경제연구소 사장도 박 단장에 이어 2011년부터 2016년까지 빙상연맹 회장을 맡았다. 현 회장은 김상항 전 삼성생명 사장이다. 삼성은 1997년부터 220억원가량을 빙상에 지원해왔다. 한국 탁구의 발전에도 이 회장의 지원이 있었다. 1978년 제일모직 탁구단 창단 당시 이건희 삼성그룹 부회장은 "10년 안에 중국을 꺾으려면 지금부터 자질 있는 어린 선수를 키워 10년은 투자해야 한다"며 꿈나무 발굴을 지시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탁구 금메달리스트 양영자 선수는 이때 발탁됐다.
이 회장은 1982~1997년 대한레슬링협회 회장을 맡기도 했다. 그는 사재 15억원을 들여 용인에 레슬링 전용 체육관을 건립해 협회에 기증했다.
고인은 야구와도 인연이 있다. 그는 부회장 때인 1982년 삼성라이온즈 창단과 함께 구단주에 취임했다. 이 회장은 구단주 시절 메이저리그(LA 다저스) 전지훈련을 주선하고, 해외 지도자들을 인스트럭터(기술코치)로 초빙했다. 선수들과 스킨십도 자주 했다. 이 회장이 2014년 5월 쓰러진 이후 삼성라이온즈의 경기를 틀어 놓으면 병상에서 반응을 했다는 일화도 있다.
삼성스포츠단에 근무하며 고인의 스포츠 사랑을 지켜봐 왔던 경일대 스포츠단장 정지규 교수는 "이 회장의 스포츠 사랑은 단순한 관심 이상이었다"며 "스포츠도 '사업보국'의 마음으로 대했으며, 한국 스포츠의 초일류화라는 큰 그림을 제시하고 독려했다"고 전했다.
한편 고인의 골프 실력은 싱글 수준으로 남들에게 뒤지지 않았다. 생전 '골프 경영'도 늘 화제였다. 그는 2003년 한남동 자택으로 계열사 사장들을 소집해 "골프채를 잡고 180야드를 치기는 쉽지만 250야드 이상을 치려면 다 바꿔야 한다. 스탠스와 그립 쥐는 법을 포함해 모든 것을 하나하나 바꿔야만 가능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승마는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준 고마운 존재였다. 승마를 접한 뒤 고인은 1980년대 초반 당한 교통사고 후유증을 잊을 수 있었다고 한다.
[정승환 재계·한상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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