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향년 78세를 일기로 25일 세상을 떠났다. 사진은 1993년 이 회장의 ‘신경영 선언’ 모습. 삼성그룹 제공 |
[세계비즈=김대한 기자] 고(故) 이건희 회장이 삼성을 초일류기업으로 만들 수 있었던 배경에는 과감한 리더십이 있었다. 위기를 감지하는 촉과 그 위기를 타개하는 능력이 남달랐던 이건희 회장. 결정적인 순간인 ‘후쿠다 보고서’와 ‘애니콜 화형식’에서 이 회장의 남다름이 드러났다.
▲‘후쿠다 보고서’, 변혁의 계기로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라.” 1993년 6월 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캠핀스키 호텔에서 임직원 회의를 주재하던 이건희 회장의 발언이다. 그의 어록에서는 변화에 대한 철학이 여실히 드러난다.
이 회장은 에세이집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에서 1987년 회장 취임 후 삼성 내부는 긴장감이 없고 부서 이기주의는 눈에 보일 정도로 심한 것을 깨달았다.
결정적으로 이 회장은 삼성전자 세탁기 생산라인의 불량품 제조 현장에서 몰래 촬영한 영상에는 세탁기 뚜껑이 몸체와 맞지 않자 한 직원이 아무렇지 않게 칼로 뚜껑 테두리를 잘라내 조립하는 장면을 보게 된다. 이와 맞물려 자신이 3년 전 스카우트한 후쿠다 타미오 고문이 쓴 보고서를 접한다. 이 보고서는 ‘후쿠다 보고서’로 삼성에 대한 냉정한 평가가 담겨있었다.
이런 상황들을 겪고 이 회장은 변혁이 필요성을 절감한다. 1993년 6월 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캠핀스키 호텔로 삼성 사장들과 임직원을 불러 모아 회의를 주재한다. 이건희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다”며 삼성의 재도약을 선언했다. 지금까지도 삼성 60년사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으로 꼽히는 장면이다.
또 “모든 변화는 나로부터 시작한다. 모든 변화의 원점에는 나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도 했다. 이것이 바로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자’는 구호로 널리 알려진 신경영 선언이다.
이후 삼성전자는 품질경영, 질경영, 디자인경영 등으로 대도약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훗날 매체 인터뷰를 통해 후쿠다 전 고문은 “그런 식의 질문을 하는 경영자는 처음이었다”면서 “CAD와 같은 특정 기술에 대한 질문, '디자이너에게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와 같은 본질적인 질문까지 했는데 식은땀이 날 정도였다”고 이 회장의 집요함을 회상했다.
▲애니콜 화형식…불량률 10% 낮춘 ‘결단 리더십’.
삼성전자가 지금의 ‘스마트폰 강자’ 타이틀을 거머쥘 수 있었던 배경에는 좋은 품질이 큰 몫을 했다. 특히 신경영 2년 후인 1995년엔 불량제품 화형식이라는 극단적인 충격요법을 시행한 게 대표적인 예다.
삼성은 90년대 초반 휴대폰 사업에 진출했다. 어디서든 잘 터진다는 의미의 ‘애니콜’이 시초다. 하지만 후발주자로서 글로벌 선두업체인 모토로라나 노키아 제품과 품질에서 차이가 컸다.
특히 가장 큰 문제는 ‘불량률’이었다. 무리하게 생산량을 늘린 탓에 불량률은 11.8%까지 치솟았다. 격노한 이건희 회장은 ‘애니콜 화형식’을 지시한다.
‘품질은 나의 인격이오 자존심!’이란 현수막을 내걸고 임직원 2000여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불량 휴대전화와 팩시밀리 등 15만 대를 불태웠다.
총 500억원어치의 휴대폰이 잿더미로 변했다. 화형식 당시 자신이 만든 휴대폰이 불타는 것을 보고 눈물을 훔치는 직원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애니콜 화형식’을 계기로 11.8%에 달했던 삼성 휴대폰의 불량률은 2%대까지 떨어졌다. 2002년에는 화면을 넓히고 ‘이건희폰(SGH-T100)’, ‘블루블랙폰’(D500)으로 ‘텐 밀리언 폰'(1000만대 판매) 시대를 열었다. 2011년부터 삼성은 스마트폰 판매 대수 세계 1위를 지키고 있다.
kimkore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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