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회장은 에세이집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에서 1987년 회장 취임 후 삼성 내부는 긴장감이 없고 부서 이기주의는 눈에 보일 정도로 심한 것을 깨닫고 1992년 여름부터 겨울까지 불면증에 시달렸다고 밝혔다. 그만큼 삼성의 체질변화가 시급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 회장은 1993년 6월 7일 프랑크푸르트 켐핀스키 호텔에 수 백명의 삼성 임원들을 호출했다. 이 회장은 이들에게 세탁기 뚜껑이 제대로 닫히지 않아 직원들이 칼로 깎아내는 모습의 영상을 직접 보여주었다.
그는 "회장이 되고 만 5년 몇개월 동안 계속 불량 안 된다, 불량 안 된다. 모든 것을 양을 없애버리고 질을 향해라. 그런데도 아직까지 양을, 양을, 양을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라며 불같이 화를 냈다. 이것이 바로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자'는 구호로 유명한 신경영 선언이다.
프랑크푸르트는 1993년 한해 동안 이 회장이 수 백명의 임원들을 이끌고 함께 한 해외 순방 프로젝트의 핵심이었다. 이 회장은 그해 2월 LA, 3월 도쿄, 6월 프랑크푸르트, 7월 도쿄와 오사카, 후쿠오카로 이어지는 대장정을 걸었다. 6개월에 걸쳐 1800여명을 대상으로 회의와 교육을 직접 실시했다. 이 회장이 임직원들과 나눈 대화는 350시간에 달했고, 이는 A4용지 8500매에 해당하는 방대한 분량이었다.
이후 이 회장은 삼성그룹의 체질변화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대표적인 게 신경영 선언 직후 실시된 '7·4'제다. 이는 오전 7시에 출근해서 오후 4시에 퇴근하는 것으로 변화의 절박감을 임직원들이 온몸으로 느끼게 하는 고육책이었다. 시행 2년이 지나 7·4제가 뿌리를 내리자 삼성 계열사들은 업무 특성에 변형하거나 자율 근무제로 발전시켜 나갔다.
신경영 2년 후인 1995년엔 불량제품 화형식이라는 극단적인 충격요법도 시행됐다. 이 회장은 불량률이 높은 무선전화기 15만대(150여억원어치)를 수거해 구미사업장 운동장에 쌓아놓고 2000여명의 임직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전량 불구덩이에 집어 넣었다. 그해 삼성 무선전화기 점유율은 전년도 4위에서 1위로 올랐다.
사실 신경영의 핵심 어젠다는 '인재경영'이라는 게 삼성 안팎의 중론이다.
그는 신경영 선언 당시 "나는 사람에 대한 욕심이 세계에서 제일 강한 사람이다. 우수한 사람을 더 데리고 더 효율을 내면 된다"며 이른바 '월급쟁이 천국'을 만들겠다고 공언했다.
첫 신호탄은 삼성이 1995년 국내 최초로 도입한 '열린 채용'이었다. 학력이나 성별 구분없이 능력만 있으면 입사기회를 줬다. 2000년엔 내부 공채기수 중심의 '순혈주의'를 포기하고 능력과 전문성을 중시한 '혼혈주의'를 인사 원칙으로 정했다. 특히 최고수준의 S급 인재 확보에 회사의 운명을 걸었다. 삼성 사장들은 2006년부터 S급 인재 확보를 위해 업무의 30% 이상을 쓰게 됐다.
여성인력 중용도 이 회장의 작품이다. 이 회장은 신경영 선언 전부터 여성 인력의 중요성을 강조해왔다. 지난 2002년부턴 아예 여성 채용 비율을 30%이상으로 높이라고 지시했다.
[정승환 기자 / 이종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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