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22 (수)

[박정훈 칼럼] "모두 강남 살 필요는 없다"던 말뜻, 이제 알겠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온 국민에게 강남 가지 말라더니 자기들은 한사코 강남에서 살겠다 한다

약자 편이라던 정권에서 집은 '계급'이 됐다

조선일보

박정훈 논설실장


대통령 비서실장이 청주 집을 버리고 강남 아파트를 선택했던 것은 문재인 정권사(史)에 남을 굴욕이다. 강남을 때려잡겠다던 청와대의 이인자가 '강남 불패(不敗)'를 보증해준 셈이 됐다. 비난이 쏟아지자 둘 다 팔겠다고 번복했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진 뒤다. 청주의 3선 의원 출신인 그가 지역구를 포기하면서까지 강남에 집착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다. 국회의장도, 충북지사도 잇따라 강남을 선택한 사실이 드러나자 국민 입장에선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 됐다. 부동산과 '전쟁'하겠다던 그 정부 맞나. 이런 정권을 믿고 집값 내리길 기다려도 되나.

문 정부가 밀어붙인 부동산 정책은 애초 실패가 예정된 코스였다. 시장 원리를 배제하고 주택 자산가들을 때려잡겠다는 계급적 프레임으로 정책을 설계했기 때문이다. 주택 공급 확대를 위한 재개발·재건축 카드는 아예 검토 대상에서 제외했다. 왜? 집 부자들이 투자 이익을 얻게 하는 것은 용인할 수 없으니까. 배 아픈 것은 못 참는다는 문 정부의 세계관은 오로지 세금 때리고 대출 틀어막는 수요 억제책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규제란 규제는 다 끌어다 21번이나 대책을 퍼부었으나 결과는 '21전 21패'였다. 거래 허가제라는 최후의 카드까지 털어 담은 21번째 대책마저 허망하게 무너졌다. 문 정부의 부동산 정책엔 파산 선고가 내려졌다.

무능도 무능이지만 광기(狂氣)에 가까운 오기로 치달았다. 수요 때리는 규제책이 안 먹힌다는 것은 일찌감치 확인된 사실이었다. 대책이 나올 때마다 강남에서 강북으로, 서울에서 수도권·대도시로 불길이 옮아 붙었다. 그런데도 이 정부는 규제의 폭주를 멈추지 않았다. 보수 정권 탓, 야당 탓, 언론 탓을 대며 남 핑계로 시간을 보냈다. 집값이 통제 불능을 치닫고 전세 시장까지 폭발하는데도 국토부 장관은 "정책이 다 작동하고 있다"고 했다. 문 대통령은 "부동산은 자신 있다"며 "장담한다"고 했다. 하도 자신만만하길래 혹시나 했으나 결국 허언에 지나지 않았다.

어떤 이들은 집값 잡으려는 정부의 동기만큼은 순수했다고 한다. 그 말에 동의하지도 않지만 설사 그렇다 해도 결과가 달라지진 않는다. 문 정부의 부동산 국정은 대국민 '사기'와 다름없었다. 되지도 않을 대책, 작동 불능의 정책을 밀어붙이며 예정된 실패 코스를 질주했다. 집값이 내려갈 테니 서둘러 사지 말고 기다리라고 했다. 대출 끼고 집 사는 '갭 투자'는 투기니까 하지 말라고 했다. 그 말을 믿고 기다린 국민만 바보가 됐다. 3년 내내 국민을 속인 것이다.

서울 아파트 중간값이 9억원을 넘어섰다. 청년들이 자기 힘으로 서울에 집 한 칸 마련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졌다. 그렇게 천문학적 수준으로 집값을 올려놓고는 대출까지 틀어 잠갔다. 현금 부자 아니면 집 살 생각조차 말라는 뜻이었다. 정부가 앞장서 청년과 서민층의 '주거 사다리'를 걷어찼다. 절망한 청년들은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을 외치고 있다. 이런데도 정부의 '선의'를 믿어야 하나. 예견된 정책 실패로 청년과 서민을 평생 무주택자로 전락시킨 것이 사기가 아니면 무어란 말인가.

정작 정치인과 고위 공직자들은 정부 말을 믿지 않았다. 국토부 장관이 "살지 않는 집은 파시라"고 겁주었지만 청와대 참모와 여당 의원들은 끝까지 버텼다. 정권의 호위무사라던 청와대 대변인은 재개발 건물을 사들여 몇 달 만에 10여억원 차익을 올렸다. 조국 전 장관 아내는 남편이 민정수석에 임명된 직후 "내 목표는 강남에 빌딩을 사는 것"이라고 했다. 어떤 다선 의원의 집 두 채는 4년 만에 23억원이 올랐고, 어떤 장관은 자기 지역구에서 재개발 딱지로 16억원을 벌었다. 대통령이 "투기와의 전쟁"을 외치는데 그 주변은 부동산으로 돈 버는 데 혈안이 돼 있었다.

2년 전, 청와대 정책실장이 "내가 강남에 살아봐서 아는데…"라며 국민 가슴에 염장을 지른 일이 있었다. 당시 그는 "모두가 다 강남에 살 필요는 없다"고 했는데, 그 '모두'에 누가 포함되고 누가 빠지는지 이제 명명백백해졌다. 권력 실세와 여권 고위층은 예외였다. 국민에겐 강남에 살지 말라면서 자기들은 한사코 강남에 살아야겠다고 한다. 청년과 서민을 주거 난민으로 만들어놓고 자신들은 부동산으로 재테크하는 길을 달리고 있다.

누구나 강남에 살 필요는 없겠지만 적어도 꿈은 꿀 수 있어야 한다. 강남은커녕 서울에 집 한 칸 마련할 희망조차 가질 수 없게 된 나라가 정상일 수는 없다.

서민과 약자 편이라던 정부에서 집은 '계급'이 되고 있다. 온 국민을 집 가진 유(有)주택 계급과, 영원히 사다리를 오를 수 없는 무주택 계급으로 갈라놓았다. 부동산 기득권자가 된 권력 실세들의 위선은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 나오는 그 유명한 풍자 구절을 연상시킨다.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어떤 동물은 더 평등하다.'

[박정훈 논설실장]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