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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2 (수)

[터치! 코리아] 부모 글을 보면 아이 글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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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품 같은 내신형 글짓기… 감성 성장판 일찍 닫힌 아이들

조선일보

김미리 주말뉴스부 기자


밥벌이 수단이 글이라는 이유로 주변 학부모들이 종종 글쓰기에 대해 물어온다. 마감 시간 맞춰 원고 투척하기 급급한 졸필 소유자는 곤혹스럽다. 일일 생산량 20여만 자(본지 하루치 신문 글자 수)인 활자 공장 숙련공으로서 내 딴에 풍월을 읊긴 한다.

얼마 전 아는 학부모가 중학생 자녀 작문 과제를 보여 주며 열을 냈다. 교사가 제시한 신문 칼럼을 읽고 구조를 파악해 요약하는 과제였다. 예시문은 AI 확산을 주제로 한 전문가가 일간지에 기고한 칼럼. 비문과 번역투가 잔뜩 껴 있어 성인의 인식 회로도 통과할 수 없는 글이었다. '글 못 쓰는 어른'과 '글 못 보는 어른'의 잘못된 만남이 아이들을 고문했다. 글쓰기는 정작 그들이 배워야 할 것 같았다.

학부모로서 글 교육을 보고 답답한 적 한두 번이 아니다. 최근 인턴 기자 논술 채점을 하면서도 그랬다. 응시생 80% 정도가 세 가지 주제 중 하나에 몰렸다. 예상 주제라 머릿속에 준비해둔 글을 옮겼을 가능성이 크단 얘기다. 개성 있는 글이 채점 잣대라는 사실은 모두가 안다. 남들과 다른 글을 준비하려 노력했을 텐데 현실은 반대였다. 기승전결 내용부터 예시, 인용까지 빼닮은 글이 쏟아졌다. 똑같은 풀이 과정을 쓴 수학 답안지 같았다. 어렸을 때부터 독서, 논술 교육을 집중적으로 받은 세대인데 왜 이럴까.

알고 지내는 논술 강사 몇몇에게 물었다. 경력 15년 논술 강사 A는 '정답 있는 내신형 국어 교육'을 꼬집었다. 어렸을 땐 창의적 글쓰기 운운하지만 중·고등학교 들어가 대입을 향하는 순간 공산품형 글이 양산된다고 했다. 점수 잘 받기 위해 기계적으로 요지 찾기, 요약하기 훈련에 몰입할 뿐 긴 호흡으로 내 글 쓸 기회는 거의 없다. A는 글 쓰면서 이게 맞나 자기 검열하는 아이들이 짠하다고 했다.

초등 글쓰기 교사인 B는 학부모와 SNS 친구를 맺었다가 좌절했단다. 부모들 글이 형편없어 놀라고, 부모 글에서 아이 글이 보여 또 놀랐다고 한다. 횡설수설 부모 SNS 글엔 그 집 아이 산만한 글이 비친단다. 이런 부모일수록 아이 글을 많이 고쳐달라고 한단다. 자기 글이 빨갛게 난도질당하는 경험을 반복하는 아이는 생각을 닫아 버린다. 생각이 글로 배출돼야 하는데 사고 변비 상태가 되는 것이다. 잔뜩 힘주고 끙끙대야 겨우 몇 줄 나온다. "제대로 쓰려 말고, 무조건 써라"(미국 작가 제임스 서버)는 글쓰기 원칙을 부모가 막는 꼴이다.

글이 어쩌다 아이들에게 노동이 됐을까.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글쓰기의 기쁨은 숙제가 아니라 교환일기, 비밀노트 같은 글 놀이에서 맛봤다. 요즘 아이들은 학원 다니느라, 숙제하느라 이런 숨구멍이 부족하다. 감성 성장판이 일찍 닫혀 버린다. '깜지' 관행을 지적하는 이도 있다. 깜지는 종이에 빼곡히 적는 것을 말하는 은어. 체벌 금지 이후 깜지 반성문을 쓰게 하는 교사가 일부 있다고 한다. 아이들에게 글쓰기 쓴맛부터 보게 했으면서 글쓰기 단맛을 억지로 주입하려 드니 먹힐 리 없다. '재미있는 글쓰기'란 '즐거운 시험' 같은 형용 모순이 된 지 오래다.

사정이 이런데 어른들 세상은 자꾸만 아이들을 집단적 글쓰기 강박에 몰아넣는다. 며칠 전 시내 대형서점에 갔더니 학부모·학생 대상 글쓰기 책이 매대에 가득했다. 표지 문구에 단골로 등장하는 단어가 성공, 비법, 기적이었다. 글쓰기는 성공하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비법도 없으며, 기적은 더더구나 일어나지 않는다. 쓰고 또 쓰는 가운데 조금씩 나아갈 뿐이다. 독일 평론가 발터 베냐민은 "책은 읽는 것이 아니라 행간에 머무르고 거주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곰삭은 생각이 글로 나온다. 아이들이 생각의 지층을 쌓도록 기다려주자. 글은 그다음이다.

[김미리 주말뉴스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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