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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5 (월)

이슈 유가와 세계경제

미친듯 춤추는 유가... 160년전 태생부터 석유는 인기 투기상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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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들어 61달러, -37달러, 다시 32달러로 널뛰기

석유산업 태동기엔 1년새 100분의 1토막나기도

올들어 국제유가의 움직임은 미친듯 춤을 추고 있다. 첫 거래일인 1월2일(현지시각) 뉴욕에서 배럴당 61달러에 거래됐던 서부텍사스산원유(WTI)는 지난달 -37달러까지 추락했다가 19일엔 다시 32달러대로 반등했다. 투자자들이 “정상적 거래라기보단 투기판 같다”는 한탄을 할 정도다. 그런데 이런 투기적 거래는 사실 160여년 전 현대적 의미의 석유산업이 태동할 때부터 그랬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61달러에서 -37달러로, 다시 32달러로
미국 뉴욕 상업거래소(NYMEX)의 WTI는 올 첫 거래일인 1월2일 배럴당 61.18달러에 마감했다. 작년 11월 50달러대에 머물다 미·중 무역분쟁 합의가 임박하면서 상승세를 탔다.(미중무역합의는 결국 1월15일 체결됐다)

모처럼 유가 상승의 단맛을 봤던 투자자들에게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 팬데믹이란 폭탄이 터졌다. 코로나 사태에 더해 사우디아라비아와 러시아 간에 시장점유율을 둘러싼 증산전쟁까지 벌어졌다. ‘엎친 데 덮친 격’이란 말이 딱 들어맞는 상황이었다. 국제 유가를 떠받치기 위해 감산에 힘을 모았던 사우디와 러시아가 ‘코로나발 유가 폭락’이란 위험요인을 눈앞에 두자 나만 살겠다고 이전투구를 벌인 격이다.

유가는 곤두박질쳤고 석유거래 사상 최초의 마이너스 유가란 기현상이 벌어졌다. 지난달 20일 뉴욕상업거래소에서 5월 인도분 서부텍사스산원유(WTI)는 전 거래일보다 배럴당 55.9달러나 하락한 -37.63달러에 거래를 마쳤다. 대공황 때도 마이너스 유가는 기록된 적이 없다. 당시 최저가는 1931년 배럴 당 0.1 달러(동부텍사스산원유 기준)였다.(시장조사기관 IHS마킷)

화들짝 놀란 사우디와 러시아는 미국의 강한 압박 속에 감산에 합의했고, 코로나발 경제봉쇄를 각국이 서서히 완화하면서 유가는 5월19일엔 32.5달러까지 반등했다.

◇현대 석유산업의 기원지는 1850년대 미국
현대 석유산업이 태동한 건 1850년대 미국이었다. 당시 실내 조명은 램프가 맡았는데, 램프의 연료로는 고래기름이나 석탄오일이 쓰였다. 고래기름은 너무 비싸서 부유층만 사용했고, 석탄에서 정제한 기름인 석탄오일은 가격은 쌌지만 악취가 심하고 그리 밝은 빛을 내지도 못했다.

이때 혜성처럼 등장한게 석유였다. 1855년 벤저민 실리먼 예일대 화학과 교수가 “석유(록 오일·rock oil)는 저렴하면서 품질 좋은 조명용 연료로 쓰일수 있다”는 보고서를 냈다. 저명 화학자인 실리먼의 발표는 ‘석유산업의 기원이 되는 역사적 전환점’이 됐다.(대니얼 예긴 IHS 마킷 부회장의 저서 ‘황금의 샘’)

석유는 빠르게 석탄오일을 대체했다. 문제는 공급이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당시 석유를 생산하는 방법은 원시적이었다. 지면에 스며나온 석유를 천으로 적신뒤 짜내는 방식이었다.

석유를 현대적 방식으로 최초 생산한건 1859년 8월27일이었다. 펜실베이니아주의 벌목 마을이던 타이터스빌에서 최초로 유전에 구멍을 뚫어(드릴링) 석유를 캐냈다. 지하 21미터에 있던 유전층이 천정에 뚫린 구멍으로 분출해 올라갔다. 기름이 쏟아져나오자 이를 담을 용기가 부족해서 온동네 위스키통(배럴)을 다 동원했다고 한다.

◇태생부터 대표적 투기상품이던 석유
1871년 미 펜실베이니아주에 세계 최초의 석유거래소인 ‘타이터스빌 석유거래소’가 설립됐다. 아무도 가격 결정 구조를 알 수 없는 석유거래의 불확실성을 줄이자는 취지였다.

그 전까지 석유 가격은 미친듯 춤을 췄다. 1861년1월 배럴당 10달러에서, 그해 말에는 100분의1토막 나면서 10센트로 폭락했다. 산유량 폭증 때문이었다. 1860년 45만 배럴이던 서부 펜실베이니아 지역 산유량은 1862년 300만 배럴, 1866년 360만 배럴로 증가했다.

가격 하락은 소비를 자극했다. 서민들까지 석탄오일 대신 석유를 실내 조명용 연료로 쓰게 만들었다. 소비가 늘면서 석유가격은 1862년말 4달러로, 1863년 9월엔 7.25달러로 뛰었다. 이후 경기침체로 1866~1867년에는 배럴당 2.4달러로 하락했다. 복잡하고 불투명한 거래 구조가 투기를 낳았다. 1870년 당시 석유거래는 세가지 형태로 이뤄졌다. 현장에서 돈을 주고 물건을 받는 현물거래(spot), 계약 체결 10일 내로 물건을 인도하는 정기 거래(regular trade), 그리고 미래 일정 시점에 고정가로 석유를 인도하는 선물(先物·futures)거래였다.

누구도 예측하기 힘든 불투명한 널뛰기 장의 전형이었다. 석유정치학의 대가인 대니얼 예긴은 저서에서 “당시 석유는 인기 있는 투기의 대상이었다”고 했다.

[최현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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