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청자 242명 중 84명 행불자로 인정받아
6명 시신 확인.. 78명은 여전히 ‘빈 무덤’
5차례 13곳 암매장 의심지 발굴 성과 없어
5·18진상규명조사위 활동에‘마지막 기대’
1980년 5월 20일 사라진 아들(이창현·당시 7세)은 40년째 돌아오지 않았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지 갓 두 달. 호기심 많고, 어려서부터 골목대장 노릇을 하던 아들은 그날 광주광역시 서구 양동시장 인근 집을 나간 뒤 광주역 쪽으로 향하는 모습이 목격된 것으로 마지막으로 자취를 감췄다.
5·18 민주화 운동 당시 아버지 이귀복(83) 씨는 전남 완도의 건축 현장에 있었다. “광주에서 큰 일이 났다고 해서 돌아오려 했지만, 길이 막혀 올 수가 없었어요. 며칠 만에 와보니 애기가 없어졌다는 거야.”
이씨는 “이후 아들을 찾아 전국을 안가본 데 없이 다녔지만 뼛조각 하나 찾지 못했다”고 했다. 한동안은 막연히 살아 있으리라는 기대를 했지만, 언젠가부터는 유골이라도 찾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전남·북은 물론 경기 파주 등 무연고 유해가 발굴됐다는 곳이면 빠짐 없이 찾아 헤맸다.
“이제 지쳐서 더 이상 돌아다닐 힘도 없어요. 그만 잊어야겠다 생각하지만 맘처럼 안돼요. 죽기 전에 뼈라도 찾아 묻어주고 가야 할텐데….”
국립5.18민주묘지 행불자묘역에 세워진 묘비 '이창현(당시 7세)의 영' 옆에 돌사진이 놓여 있다. /김영근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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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처럼 5·18 당시 가족을 잃어버린 행방불명자 가족들의 아픔은 40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진행형이다. 평생을 밤이면 대문을 열어둔 채 자식을 기다리던 부모들 일부는 유명을 달리 했고, 대부분은 고령에 심신의 고통으로 ‘가족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마저 잃어가고 있다.
고모(60) 씨는 “5·18때 실종된 동생을 평생 기다리던 어머니가 중환자실에 계신다”며 “지금은 (동생에 대해)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5·18 때 여동생이 행방불명된 A(50대) 씨는 이후 돌아가신 어머니는 물론, 온 가족이 고통 속에 살아왔다고 했다. 그는 “이제는 5·18 관련 뉴스도 보지 않는다. 정신과 치료도 받고 있다. 훗날 역사의 기록으로 남기려 글을 쓰고 있다”고 했다.
5·18 당시 행방불명자 문제는 발포 책임자, 헬기 사격 유무 등과 함께 40년이 지나도록 진실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5·18 진상규명의 핵심 과제로 여전히 남아 있다.
당시 행방불명자로 인정받은 이는 지난 1990년부터 2015년까지 7차례에 걸쳐 신청한 242명 가운데 84명이다. 이들 중 유골을 찾아 사망자로 확인된 이는 6명 뿐이다. 지난 2002년 광주광역시 북구 망월동 5·18 옛 묘역 무연고 묘지에 묻혀 있던 11기가 발굴돼 이들 중 6명이 유전자 검사를 통해 가족을 찾은 것이다.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나머지 5기는 현재 국립 5·18묘지 무명열사의 묘역에 안장됐다.
아직 유골조차 찾지 못한 78명은 행방불명자 묘역에 주검 없는 묘와 ‘○○○의 영(靈)’이라는 묘비로 서 있다.
국립 5.18 민주묘지 행방불명자 묘역. /김영근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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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행방불명자를 찾기 위한 시도는 끊임 없이 반복돼 왔지만, 번번이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지난 1997년 5·18이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받은 뒤 광주광역시는 시민 제보 등을 바탕으로 암매장 추정지 발굴에 나섰다. 2002~2003년 1차 발굴조사 때 광산구 소촌동과 삼도동 야산에서 유골 10기가 나왔으나 행방불명자 가족들과 일치하는 유전자는 없었다. 광주통합병원과 황룡강 제방, 상록회관에서도 유골을 찾지 못했다.
2006~2007년 2차 발굴에서도 광주문화예술회관 뒷편과 북구 장등동 야산에서는 유골이 나오지 않았고, 남구 주월동 아파트공사 현장에서 유골 5기가 나왔으나 5·18과 관련이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북구 효령동 야산을 발굴했던 2008~2009년 3차 조사에서도 유골과 과자봉지, 요구르트 병 등이 나왔지만 5·18과 관련성을 찾지 못했다.
지난 2018년에는 5·18기념재단이 옛 광주교도소 북쪽 담장 일대에 대한 암매장 추정지 발굴에 나섰다.
광주교도소는 5·18 당시부터 최근까지 암매장 관련 제보가 끊임 없이 이어진 장소다. 18일 40주년 기념식에서 편지 형식의 사부곡을 읽은 최정희씨의 남편 고 임은택(사망 당시 36세)씨도 1980년 5월 31일 교도소 인근 암매장 시신 발굴 현장에서 발견됐었다.
특히 2018년 당시 발굴은 5·18 때 이곳에 주둔했던 제3공수여단 간부가 과거 검찰 수사 때 작성했던 암매장 지도를 토대로 진행돼 적잖은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문화재 발굴 방식으로 진행된 조사에서는 지하 배관과 굴착 흔적만 확인했을 뿐 유골을 찾지 못했다.
올해 초 옛 광주교도소 부지 발굴 역시 성과 없이 끝났다.
광주광역시와 5·18기념재단이 5차례에 걸쳐 13곳을 발굴했지만 모두 실패한 것이다.
지난 1월 30일 광주광역시와 5.18 기념재단이 광주 북구 문흥동 옛 광주교도소 무연고자 묘지 인근에 있는 텃밭에서 암매장 의심지 발굴 조사를 벌이고 있다. /김영근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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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12월 옛 광주교도소 부지에서 매장 기록이 없는 유골이 무더기로 발견되면서 또다시 5·18과 연관성 여부가 관심을 모았다. 현재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서 유골 분류 작업을 끝내고 유전자 분석 작업을 하고 있다.
광주광역시는 행방불명자로 신청한 154가족 338명의 혈액을 채취해 유전자를 보관하고 있다. 또 지난해 12월 이후 추가로 17 가족 18명의 혈액을 추가로 채취해 유전자 분석 중이다. 광주교도소 터에서 발굴된 유골은 이들 가족의 유전자와 대조 작업을 벌이게 된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유전자 분석·대조 작업에 6개월~1년이 걸릴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광주광역시와 5·18기념재단 관계자들은 “발굴된 유골의 상태 등 여러 정황으로 미뤄 5·18과 관련 가능성이 높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국회의 특별법 제정에 따라 지난 해 말 출범한 ‘5·18 진상규명조사위원회’(이하 조사위)가 지난 12일 조사 활동에 들어갔다. 이에 따라 행방불명자를 찾는 오랜 과제가 해결될 수 있을지 주목받고 있다.
광주광역시와 5·18기념재단은 지난 7일 최근2년 사이 접수된 5·18 진상규명 관련 제보 210건을 조사위에 전달했다. 이 가운데 행방불명자 관련 제보는 48건이다. 조사위는 계엄군 발포 경위와 책임자, 민간인 집단 학살과 행방불명자 규모·소재, 북한군 개입설의 진상 등을 핵심 과제로 선정하고 3개 팀이 이들 과제를 맡아 진상을 규명할 계획이다.
그러나 거듭된 암매장 의심지 발굴이 성과를 거두지 못한 데다, 가해자 등에 대한 강제 조사권이 없고, 군 관련 기록도 긴 세월동안 없어지거나 왜곡된 경우가 많아 조사위의 활동이 실질적인 성과를 거둘수 있을지 예단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런 점을 고려해, 조사위는 당시 광주에 주둔했던 군 부대와 관련된 집단 사망 사건에 관여한 이들을 직접 조사해 이들의 고백과 증언을 이끌어내는 데 주력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허연식 조사위 조사2과장은 “아직 흔적조차 확인되지 않은 행방불명자 78명의 원혼과 가족들의 고통을 감안하면, 이제는 가해 현장에 참여했던 이들이 양심적 증언과 고백을 해야 할 때”라며 “당시 광주 계엄군의 진압 과정에서 발생한 사망자 처리와 송암동 등 민간인 집단사망 사건 등에 관여한 당사자들을 조사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국회 청문회와 검찰의 5·18 관련 수사, 국방부 과거사 조사 등에 이은 이번 조사위의 활동은 40년이 흐른 과거사의 진실을 찾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지적이다. 앞으로 2년 6개월여 활동할 조사위가 행방불명자 가족들의 기나긴 한을 풀어줄 수 있을지 주목받고 있다.
[김성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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