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잠행 기간 동안 트럼프, 친분 흔드는 발언 안 해
북한 급변사태 일어나면 위기 상황 다룰 준비 돼 있을까
강인선 부국장 |
워싱턴의 한 북한 전문가는 최근 "내가 김정은이 건강하기를 바라게 될 줄은 몰랐다"고 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지난달 15일 태양절 행사에 불참한 후 20일간 사람들 눈앞에서 사라졌다. 북한 비핵화를 위해 강력한 제재를 주장해온 이 전문가는 전 세계가 코로나 바이러스 위기에 빠진 상황에서 또 다른 위기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자신도 모르게 김정은의 안위를 걱정하게 되더라고 했다.
김정은 건강 이상설은 애당초 맞느냐 틀리느냐로 속끓일 문제는 아니었다. 어차피 시간이 흐르면 사실은 밝혀지게 돼 있었다. 하지만 김씨 가계의 건강 문제는 언제든 북한 체제와 지역 안보 위협으로 이어질 수 있는 위험 요인이라 정보가 충분치 못한 상황에서도 소문과 추측은 불타올랐다.
이 혼란의 20일 동안 북한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도 많은 것을 얻어냈다. 북한 입장에서 가장 큰 소득은 트럼프-김정은 관계의 온도를 재본 것이다. 지난달 21일 CNN의 김정은 건강 이상설 첫 보도 직후 트럼프의 반응은 "모른다"였다.
이틀 후 트럼프는 "(CNN이) 오래된 문서를 썼다고 들었다"며 사실관계가 틀렸다는 반응을 보이더니, 이후 "(김정은의 상태를) 알지만 말할 수 없다"와 "김정은이 건강하길 바란다"는 발언으로 일관했다. 잠적 20일째 김정은의 비료공장 준공식 참석 영상이 공개되자 트럼프는 "그가 돌아온 것, 건강한 것을 보게 돼 기쁘다"고 했다.
트럼프 이후 미·북 관계는 트럼프-김정은의 개인 관계로 환원돼 있다. 김정은의 잠행 기간에 트럼프는 김정은과의 관계를 흔들 발언은 자제했다. 그 자체가 김정은에겐 중요한 메시지였을 것이다.
트럼프 손에 이끌려 국제무대의 한가운데 섰던 김정은은 TV 리얼리티쇼의 초대 손님 같은 존재로 극화됐다. 하지만 그가 시야에서 사라지는 순간 국제사회는 불안을 느꼈다. 절대왕정이나 다름없는 북한 체제는 그의 신변 이상으로 위기에 빠질 수 있고, 김씨 왕조가 만들어온 핵무기가 통제 불능 상태에 빠질 수도 있다는 악몽을 일깨웠기 때문이다.
북한에 대한 트럼프의 단순하고 허술한 구상도 옷을 벗었다. 북핵 문제에 대한 트럼프의 '비전'은 세 차례 만남을 통해 '친구'이자 '좋은 관계'를 맺은 김정은과 협상해 핵을 포기시키고 북한의 경제적 잠재력을 최대화하는 기회를 주겠다는 것이다. 거기까지다. 그나마 진도는 제대로 나가지 못했다.
김정은의 건강 이상설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에 트럼프는 "김정은이 잘 지내길 바란다"고 했다. 그때 요즘 말로 '현타(현실 자각 타임)'가 왔다. 이런 발언을 하는 트럼프의 북한 급변 사태 대책은 무엇일까, 그런 대책을 심각하게 고민해본 적이 있긴 할까라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국무·국방부와 정보기관들은 지난 수십년 동안 북한 급변 사태에 대한 대응 시나리오를 수없이 만들고 끊임없이 고쳐왔다. 그 대책들은 김정은과 '서로 좋아하는 사이'라고 주장하는 트럼프 대통령 시대에도 유효할까. 아니면 트럼프는 김정은과의 새로운 관계를 고려한 트럼프 버전의 급변 대책을 마련하고 있는 것일까.
한판 소동으로 끝난 김정은 건강 이상설이 사실일 때 미국은 어떻게 대응할까. 미국의 전직 외교관은 "북한 관련 실무를 다룰 관리와 외교관이 부실한 트럼프 행정부가 그런 위기 상황을 다룰 준비가 돼 있는지 의문"이라고 했다. 중국에 주도권을 뺏길 가능성도 우려했다.
미국 대선이 채 여섯 달도 남지 않았다. 미국은 코로나 바이러스 위기와 한창 전쟁 중이다. 대통령의 권한은 위기를 발판으로 확대되는 경향이 있다. 트럼프는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기 위해 현상을 교란시키는 데 탁월한 재능을 가졌다. 코로나 위기가 트럼프 재선을 막는 수렁으로 변할 때 김정은은 트럼프에게 불확실성을 만드는 유용한 카드일 수 있다.
[강인선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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