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찍은 뉴욕의 히스패닉 왜 변심했는지 물어봤더니…
지난 5일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득표율이 2020년에 비해 얼마나 올라갔는지를 나타내는 그래픽. 화살표 굵기가 두꺼울수록 상승 폭이 컸다는 뜻이다. /그래픽=김성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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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가가 너무 많이 올랐어요. 휘발유 가격이 이렇게나 뛰었는데 누가 (집권당인) 민주당을 좋아하겠습니까. 제 주변 친구 중 카멀라 해리스(2024년 대선 민주당 후보)를 찍은 사람 아무도 없어요.” 11일 오후 미국 뉴욕 퀸스의 노스코로나에서 만난 대학생 제이슨 오티즈는 “(공화당 대선 후보) 도널드 트럼프에게 투표했다”고 자랑스러운 듯 말했다. “나 같은 학생들은 돈 걱정이 가장 큽니다. 해리스가 주장한 낙태권 보장 같은 이념적 문제는 그다음이죠.” 약 5만명이 사는 노스코로나는 뉴욕에 자리 잡은 중남미 히스패닉계 이민자들이 모여 살아 ‘작은 남미’로 부른다. 히스패닉 인구 비율이 85%에 달한다. 지하철역에서 나가자 멕시코·에콰도르 등 중남미 국가의 국기가 펄럭였다. 상점 간판은 대부분 스페인어였다.
그래픽=김성규 |
트럼프 캠프가 유세 내내 공격해온 중남미 이주자들이 많이 사는 동네인데도, 이곳 유권자들의 트럼프 지지율은 4년 전보다 크게 상승했다. 2020년 대선 때는 민주당 후보였던 조 바이든이 득표율 55%포인트로 트럼프에게 압도적 우위를 보였다. 이번에도 해리스가 트럼프보다 높은 표를 받기는 했지만, 득표율 차는 6%포인트로 좁혀졌다. 이주자가 많이 사는 퀸스 전체에서도 해리스와 트럼프의 득표율 차는 2020년 46%포인트에서 25%포인트로 크게 줄었다. 트럼프 득표율이 10%포인트 넘게(26.8→37.3%) 급등한 결과다.
대선에 세 번 출마한 트럼프는 올해 처음으로 전국 득표율이 민주당 후보에게 앞섰다. 공화당의 ‘붉은 파도’가 민주당 텃밭으로 여겨진 진보 성향 지역으로도 몰아치며 뉴욕·캘리포니아 등 대도시 밀집 지역도 트럼프 득표율이 일제히 상승했다. 본지가 올해 대선 선거인단이 배분된 50주 및 워싱턴 DC의 득표율을 분석한 결과, 2020년에 비해 모든 지역에서 공화당 득표율이 높아지는, ‘유니폼 레드 스윙(uniform red swing, 공화당 지지율 일괄 상승)’이 발생했다.
미국 뉴욕 퀸즈의 노스 코로나 거리. /윤주헌 특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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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전에 비해 공화당 지지율이 가장 올라간 상위 다섯 주 중 네 주가 뉴욕(6.5%포인트)·미네소타(5.8%포인트)·뉴저지(5.0%포인트)·매사추세츠(4.4%포인트) 등 전통적으로 진보 성향이라 여겨진 주였다.(나머지 하나는 4위 플로리다) 민주당이 ‘안전지대’로 여겼던 ‘블루 스테이트’의 보수화가 예상보다 심각하다는 뜻이다. 역시 탄탄한 민주당 ‘표밭’으로 여겨져온 일리노이(6위)·캘리포니아(9위) 등도 공화당 득표율이 올라간 상위권 주에 이름을 올렸다.
주지사와 시장이 모두 민주당 소속인 뉴욕은 해리스가 55.8%를 얻어 44.2% 득표율을 기록한 트럼프를 이기긴 했다. 하지만 23.1%포인트 득표율 차이가 났던 2020년에 비하면 득표율 차가 11.6%포인트로 반 토막이 났다. 트럼프 득표율은 1988년 대선 이후 최고였다. 미 정치 전문 매체 폴리티코는 “민주당의 뉴욕 장악력이 느슨해지고 있다”고 했다. 뉴욕 통근자가 많은 인접 주 뉴저지는 득표율 차가 한 자릿수(6%포인트)로 좁혀졌다. 4년 전엔 민주당이 15%포인트 차이로 여유 있게 이겼지만, 이젠 안심권에서 벗어났다는 평가다.
이번 대선 때 공화당으로 마음을 바꾼 유권자 중엔 히스패닉이 가장 많은 것으로 분석된다. CNN의 인종·성별 출구조사 결과, 트럼프에게 투표한 히스패닉 남성 비율은 55%로 4년 전(36%)에 비해 크게 올랐다. 트럼프를 찍었다는 히스패닉 여성 비율도 30%에서 38%로 상승했다. 다른 그룹의 경우 변화 폭이 1~2%포인트로 미미했지만, 히스패닉은 변심(變心)의 강도가 강했다. 히스패닉은 미 인구의 약 20%를 차지한다. 출산율이 높아 인구 비율이 빠르게 늘고 있기도 하다.
그래픽=김하경 |
히스패닉이 보수화된 이유로는 여러 요인이 꼽힌다. 2020년 코로나 팬데믹 이후 이어진 인플레이션이 중·저소득층이 다수인 이들의 삶을 특히 팍팍하게 만들었다는 평가가 많다. 트럼프 득표율 상승세가 강했던 뉴욕·뉴저지·네바다 등은 모두 집값과 식료품비를 포함한 필수 물가의 상승 폭이 다른 주보다 컸던 지역이다. 트럼프는 인플레이션을 바이든 정부의 실정(失政)으로 공격하면서, 식당 종업원 등을 겨냥해 감세 정책 같은 ‘당근’을 제시하며 히스패닉을 공략했다. 해리스가 유세 내내 강조한 여성의 낙태권, 성소수자 인권 신장 등이 보수적인 천주교 신자가 많은 히스패닉 유권자에게 거부감을 주었다는 분석도 있다. 이번 대선에서 천주교는 58%, 기독교는 63%가 트럼프에 투표했다.
트럼프가 공격한 불법 이주자 과잉 문제도 히스패닉들의 공감을 이끌어냈다. 바이든 집권기에 미국으로 쏟아져 들어온 이주자들이 초래하는 부작용을 가장 실감하는 이들이 같은 커뮤니티에서 생활하는 히스패닉들이기 때문이다. 노스코로나에서 15년째 식료품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에콰도르 출신 새뮤엘씨는 “트럼프가 지지를 얻는 이유를 알고 싶은가”라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주자들은 여기 와서 공짜로 먹고 공짜로 잡니다. 심지어 가게에 한 명이 들어와서 내게 말을 거는 동안 다른 사람이 저 뒤쪽에서 물건을 훔치는 일도 벌어진단 말입니다. 트럼프가 주장한 강력한 국경 통제가 꼭 필요한 상황입니다.”
퀸스에서 이발소를 운영 중인 브라질 출신 마르코 아우렐리우 피누는 “나는 이발을 해주고 35달러를 받는데 불법 이주자들은 불법 이발소를 차려놓고 15달러를 받고 손님을 빼앗아간다. 우리처럼 제대로 된 사업을 해보려는 사람들에게 정말 골칫덩이”라고 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불법 이민에 대한 관대함, 경찰 조직 약화 등 민주당의 정책들은 흑인과 히스패닉 남성, 노조에 소속된 노동자들에게 불만이 쌓이게 만들었고 결국 표심(票心)을 떠나게 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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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윤주헌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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